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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ge Story/History Story

벌레가 부르는 재앙 - 황재(蝗災)

by 늘상의 하루 2022. 8. 18.

인류사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수많은 재앙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한재(旱災),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수재(水災), 불로 모든 것들이 타오르는 화재(火災), 서리가 내려 곡식이 얼어붙는 상재(霜災) 등이 있습니다.

 

재앙들은 주로 천재지변(天災地變)이라 하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들을 이야기하며 인류사 모든 재앙은 정주민, 즉 농부와 자연의 대결로 표현됐습니다.

 

말이 대결이지만 그 피해는 일방적입니다. 인간들은 측정할 수 없는 거대하고 파괴적이며 형태가 없는 것들과 마주하며 자신들에게 닥친 재난을 피하기 위해 신앙에 기대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가뭄을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고, 수해를 대비해 제방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치수(治水)는 물론 지진의 피해를 줄이고자 특별한 시공법으로 건물을 지었고, 화재를 대비하기 위해 소방대를 꾸렸습니다.

 

어떤 문명들은 끔찍한 재난을 피하기 위해 천문학을 공부하고 점성술을 익혀 자신들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날들을 기록하여 역법을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인류는 앞날들을 예측하고 대비하여 피해를 줄이는 법을 익혀 나갔지만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게 충격을 준 재앙이 하나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메뚜기 떼가 전조도 없이 몰아쳐 지나치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는 황재(蝗災)라 불리는 재앙입니다.


황충의 특성

평범한 메뚜기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손가락만한 크기에 오동통한 메뚜기는 특정 지역에서 맛난 간식으로 쓰이기도 하며 조용히 풀을 뜯는 초식 곤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대량 부화하는 순간 상황은 극단적으로 위험해지기 시작합니다. 메뚜기는 특이하게도 집단으로 구성되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존을 위한 집단 행동은 으레 생명체들에게 흔히 보이는 특성 중 하나지만 메뚜기들은 조금 다릅니다.

 

보통은 단순한 집단행동으로 이루어지지만 메뚜기들은 다른 종으로 변태하듯 모습을 바꿉니다. 먼저 강력한 호르몬 변화를 겪으며 세로토닌이 과다 분비되고 보호색이 사라지며 노랗게 변합니다.

 

덩치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며 장거리 비행에 적합하게 뒷다리가 퇴행하고 날개가 발달합니다. 바람을 타면 200Km의 거리를 주파하고 해발 2000m 안팎의 고도까지 상승할 수 있습니다.

 

식성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참새만한 크기까지 성장하며 자기 몸의 두배나 되는 작물을 하루만에 먹어치웁니다. 평균적인 황충의 군체가 수억 마리 안팎이니 그것들이 이동하며 먹어치우는 작물의 양 역시 어마어마합니다.

 

그 경우가 너무 심할 때는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으며 누군가에게 명령이라도 받듯 집단 전체가 함께 움직이기에 황충떼가 등장하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 규모와 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 하나 잡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나마 유의미한 효과를 보이는 살충제를 뿌리면 토양은 오염되고 상상으로만 즐기던 화염방사기를 쏘면 토양 오염은 물론 불꽃쇼가 벌어져 지상이 불바다가 됩니다. 작물을 숨겨 놓아도 비닐을 찢고 벽 틈 사이로 들어와 결국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먹어치우고 사라집니다.

 

잡아 죽인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메뚜기들의 시체는 설치류들의 먹이가 되어 온갖 전염병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살충제도 없었던 옛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히 신이 내린 재앙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황충의 역사

가장 유명한 황충에 대한 기록은 성경 출애굽기에 등장합니다.

 

신의 대리인 모세는 이집트 왕조에 10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중 하나가 도시를 뒤덮는 메뚜기 떼였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메뚜기 떼는 나쁜 징조나 죽음 그 자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기원전 2470년에서 2220년 사이에 만들어진 무덤들에는 메뚜기들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꾸란 역시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메뚜기를 기독교와 같이 나쁜 징조와 상징, 재앙적인 존재로 표현합니다. 그 외에도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에도 메뚜기 재앙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 등장하며, 곤충에 관심이 많았던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메뚜기의 생태를 연구하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메뚜기와 싸운 역사가 3천년에 달할 정도로 이집트 못지않게 많은 메뚜기에 시달렸고 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기원전 9세기부터 황충을 전담하는 관리 부서를 따로 만들 정도로 대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고 산서성에 있는 사당의 벽화에는 메뚜기와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한나라 시절에는 메뚜기를 잡아 땅에 묻었고, 당나라 시절에는 잠자리채와 유사한 물건을 만들어 메뚜기를 잡아 묻고 태우고 물을 뿌렸으며, 송나라 시절에는 서식지 자체를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명나라 시절에 편찬된 농경전서에서는 메뚜기에 대한 피해와 그 위험성을 설명하고 서식지를 파괴하는 방법을 권장하며 황충을 막기 위해 벌레를 잡아먹는 오리를 집단적으로 키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메뚜기들이 성체가 되어 황충으로 무리를 지으면 말 그대로 재앙이 되어 대책은 효과를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황충에 대한 시인들의 시가 꾸준히 남아 있으며 황충이 장안을 뒤덮었을 때 당태종이 메뚜기를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후 2020년 동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메뚜기 때가 홍해와 인도를 넘어 중국에 도달하려 할 때, 공산당 정부는 농경전서의 권장대로 다시금 10만마리의 오리를 동원하여 메뚜기를 막고자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지독한 재앙이 반복되니 두려움의 대상을 숭배함으로써 피해를 줄이고자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발버둥처럼 메뚜기 피해가 심했던 화북과 장강을 중심으로 메뚜기를 숭배하는 사당이 약 870개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사상 최대치의 황충 무리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1870년 로키산 메뚜기 12조 5천억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고 파괴했습니다. 메뚜기와 메뚜기 시체가 너무 많아서 기관차 바퀴가 헛돌 정도였으며 무리의 크기가 캘리포니아 주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다행이라면 로키산메뚜기는 집단 발생 30년만에 어느 기점으로 증발하듯 사라졌습니다.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으나 서식지 파괴와 도시 개발로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층을 쌓을 정도로 무더기로 나온 시체들이 로키산 빙하 일대에서 발견되어 무리 이동을 하다가 실수로 로키산에 박아 모두 얼어죽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황재(蝗災)라 하여 태조실록부터 꾸준히 등장하는 재앙 중 하나였습니다. 세종 시절에는 충재(蟲災)·황재(蝗災)를 논하며 중국을 예시로 들었고 이에 따라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해결을 봐야 한다며 농사직설 편찬을 명하기도 했습니다. 중종과 영조 시절에는 황재(蝗災)가 들끓어 민심을 달래고자 따로 제사를 지낼 정도로 중요하게 살피기도 했습니다.

 

현대에서도 끊임없는 연구와 실시간 모니터링을 통해 뿌리부터 끊어내는 방법이 최선일 정도로 황충은 한번 발생하면 제압하기 어려운 재해 중 하나입니다. 잡자고 하면 살충제를 잔뜩 뿌려 잡을 수 있지만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로 쉽사리 시도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의 오리 동원령처럼 세계 곳곳에서 친환경적인 방법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황충떼는 그 실체가 명확하기 때문에 더 두렵게 느껴지는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인지를 압도하는 수억마리의 메뚜기 떼가 만드는 소음과 게걸스러운 식탐은 물론 참새 크기만한 징그러운 사이즈로 사방을 뒤덮는 광경이 저항이 무의미한 재앙 그 자체였기에 아바돈에 대한 표현처럼 종교에서도 더욱 강조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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