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성벽은 단순히 방어적인 목적을 넘어서 인류사에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작은 부족 공동체가 둘러치기 시작한 울타리부터 민족이 쌓아 올린 거대한 담벼락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독립적인 문화와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성벽이 존재함으로 위협할 수 없는 하나의 민족이 완성되었고, 성벽이 존재함으로 침범할 수 없는 하나의 국가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도시 밖으로 추방시켰고, 중국에서는 성벽 안에 사는 이들을 진정한 시민으로 인정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성곽을 bourg라 불렀으며 이는 이후 성 안에 사는 사람들 부르주아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國 나라 국이라 불리는 한자 또한 성곽과 그 내부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만들어낸 나비효과를 생각하면 단순히 정착하고 모여 사는 것을 넘어 벽을 두르고 안과 밖을 나눈 일이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동과 서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성의 단계적인 발전과 방어를 위한 구조에 대해 살펴볼 계획입니다.
판축 공법 - 토성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성을 축조하기 위한 재료(석재, 목재)가 인근에 풍부해야 하며 성까지 운반할 수 있는 교통이 원활해야 합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뛰어난 석재 가공술과 건축 기술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초창기 진시황의 장성은 벽돌로 쌓아 올린 석벽이 아니었습니다. 일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랫동안 축조되었기에 각 시기마다 건축 방법이 달라졌으며 삼국 무렵까지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습니다.
이를 토성이라 부릅니다.
흙은 성벽을 축조하는데 있어 훌륭한 재료 중 하나입니다. 최초의 토성은 단순히 흙을 쌓아 올리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흙과 섬유질을 섞어 쌓은 흙을 번갈아가며 쌓아 올렸습니다.
이를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판축공법이라는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목재 판으로 틀을 만들고 그 속에 흙을 채워 누릅니다. 그리고 틀을 높여가면서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성은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볼 때 파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공세에 외벽이 벗겨지면 환경에 따라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되곤 했습니다. 흙이 무너져 적들이 넘어올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기도 했고 이 상태에서 폭우가 쏟아지면 드러난 성벽의 흙이 쓸려내려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외벽을 석재로 교체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개선됩니다.
모트 앤 베일리(Motte and Bailey), 고르드(Gord) - 목조
중세 초기부터 중기까지 방어를 책임진 모트 앤 베일리에서 핵심적인 구조는 크게 3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형을 활용한 언덕(Motte)과 평지(Bailey) 그리고 모트 위에 놓인 아성(Keep)입니다.
모트앤베일리는 단순히 벽을 쌓는 것을 넘어 전략적으로 생활공간과 군사적 공간을 구분하고 적들의 공세에 대비하여 방어적인 구조를 지닌 요새화된 거점입니다.
-대부분 약탈이 주 수입원인 바이킹과 훈족들이 방어 타겟이었습니다.-
1차 방어선인 베일리에는 여관, 대장간, 빵집, 잡화점 등 시민들의 주거 공간과 생산 건물들이 존재합니다. 통나무를 박아 넣은 목책이 둘러싸고 있으며 순찰을 위해 나무로 만든 회각로가 있고 그 너머에는 해자가 존재합니다.
-일정 거리마다 적들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적들의 습격이 발생하면 시민들은 모두 모트에 있는 킵으로 대피하고 병사들은 1차적으로 베일리에서 적들의 공세를 막아냅니다. 그러나 공세가 격렬해져 뚫리기 시작하면 병사들 역시 모두 2차 방어선인 모트로 후퇴합니다.
킵은 모트 안에 존재하는 요새화 된 탑입니다.
농성을 위한 창고와 방어 시설, 그리고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이 존재합니다.
초기에는 망루의 역할을 중시했기 때문에 단순히 목재로 만들어진 높은 탑을 킵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전략적인 가치가 높아지고 화공에 대비를 하기 위해 킵 자체만으로 모트의 요새 역할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이후 재건축을 진행하여 목재로 만들어진 킵을 허물고 돌을 쌓는 석재 킵을 축조했으며 기술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회반죽을 섞은 견고한 아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숲 자원이 풍부한 동유럽의 경우 고르드(Gord)라 불리는 정착지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목책을 보다 견고하게 만들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울타리를 친 지역을 뜻하는 고르드는 도시를 뜻하는 그라드(Grad)의 어원이 되었으며 많은 동유럽의 도시들이 고르드와 그라드를 따온 이름을 지니게 됩니다.-
고르드의 성벽은 앞서 나온 판축공법과 유사하게 통나무를 깎아 사각으로 쌓아 올려 그 내부를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입체적으로 설계된 동유럽의 목재 성벽은 평면적인 목책보다 훨씬 더 공세를 막기에 유리했습니다.
이 방법은 비잔틴과 이슬람의 축조 기술을 받아들여 석벽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유럽에서 가장 견고한 목재 축조 기술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아래에는 게임에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지만 깊이가 있어 참고자료로 첨부했습니다.
https://youtu.be/n_oVXqwnXac?t=46
석조 성의 발전
비잔틴 문명과 인더스 문명 사이에 위치한 중동은 당시 세계에서 발전이 가장 빠른 지역이었습니다.
로마의 유산을 인수받은 비잔티움 제국이 위명을 떨치고 있으며 성지 이스라엘에서는 중동을 지배하는 아바스 왕조가 떠오르는 태양처럼 사막의 대지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광활한 토지에서 나오는 흙을 사용하여 벽돌을 만들었고 회반죽을 섞어 거대한 요새를 쌓았습니다. 커튼월(Curtain wall)이라 부르는 성벽은 여장과 총안이 설치되어 있으며 일정 거리마다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성벽이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진 요새도 존재합니다.
고대 예리코의 성벽은 옹벽과 성벽을 세우고 그 너머에 흙을 채워 성벽의 높이를 올리면서 견고함을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두 번째 성벽을 쌓아 올림으로서 적들이 넘볼 수 없는 방비를 자랑했습니다.
옛부터 쌓아 올려진 기술은 멈추지 않고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무적 방어를 자랑하는 삼중성벽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순례자들을 맞이했습니다. 중동은 최신 공성 장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축성 기술을 극한으로 끌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과 아랍의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이며 비잔틴과 이슬람의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한 유럽의 성들은 한 단계 도약하게 됩니다.
우선 모트 앤 베일리 구조에서 멀어지고 성벽과 킵 자체를 발전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가장 좋은 참고 자료로는 프랑스의 게드롱 관광지가 있습니다. 이곳은 옛날 방식 그대로 중세 시대 성을 축조하고 있는 실시간 체험형 고고학적 현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돌과 돌을 운반할 원활한 교통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성을 건설하는 현장 인근에는 채석장이 요구되며 바위를 옮길 마차와 길, 그리고 가공할 기술자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전통적인 석재 가공기술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쓰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에 손드릴로 구멍을 뚫고 쇄기를 박은 다음 순서대로 망치질을 하여 바위를 잘라냅니다.
이렇게 잘라낸 바위들은 석공들이 다듬은 다음 마차를 통해 건설 현장으로 운반합니다.
성벽에 돌을 쌓을 때는 바깥쪽에는 튼튼하고 견고하게 깎은 벽돌을 쌓고 안쪽에는 다듬지 않은 바위와 자갈 그리고 틈새를 채울 회반죽을 사용하여 벽을 쌓아 올립니다.
성벽과 해자
유럽이 십자군 전쟁으로 받아들인 축성 기술은 기존에 있던 성벽과 해자를 보다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켰습니다.
성벽은 사각을 제거하기 위해 비스듬하게 경사가 생기고 원형의 탑이 추가되거나 각종 기술이 도입되었습니다. 때로는 해자 자체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보디암 성과 같은 경우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성가퀴 또는 여장이라고도 불리는 구조물은 성벽 위에 톱니 모양처럼 튀어나와 수비군이 그 사이사이로 적을 공격하고 또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엄폐 공간을 제공합니다.
총안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엄폐와 동시에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성벽 혹은 성가퀴에 좁은 구멍을 만들어 원거리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구멍입니다.
성벽에는 일정 거리마다 탑(Tower)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탑은 적들을 감시하는 망루의 역할과 동시에 보급품을 적재하는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성의 역할을 하는 킵이 성벽과 일체화되어 중심탑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성벽과 탑들은 수직에 가까운 경사와 사각형의 모양을 띄고 있었으나 이는 공성병기의 공격에 취약하면서 적들이 성벽에 가까이 붙으면 시야에서 벗어나는 사각을 만들어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겪은 유럽의 지도자들은 아랍의 축성 방식을 배워 수직 성벽과 사각을 만드는 탑을 배제하고 경사진 성벽에서 드럼 타워(Drum Tower)라 불리는 돌출되는 원형 혹은 다각의 탑을 만들어 사각을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여의치 않는 경우에는 기존의 성벽을 개축하여 망대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효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많은 성들이 둥근 탑으로 축성되기 시작합니다.
해자는 성벽 주위에 구덩이를 파서 물을 채워 넣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해자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강이나 호수 주변에서 축조하는 성이나 겨우 사용했으며 물이 없는 지역에서는 단순히 구덩이만 파 놓거나 날카로운 말뚝을 박아 두기도 했습니다.
- 컨텐츠에서는 해자에 악어를 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
해자는 오물을 처리하던 시대적 위생 관념상 결코 청결하다고 할 수 없었기에 상처를 입은 채로 들어가는 경우에는 감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호딩과 마시쿨리 (Hoarding, Machicoulis)
앞서 이야기했듯 옛 유럽의 성벽은 적들이 성 가까이 붙으면 사각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세 사람들은 성벽에 호딩(Hoarding)이라 불리는 목재 구조물을 설치했습니다.
상기 이미지의 카르카손 성벽에 설치된 목재 구조물이 호딩이며 성가퀴에 확장된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고안된 시설입니다.
방어자들은 탈부착이 가능한 호딩을 통해 불 붙은 기름 단지나 바위, 화살을 사용하여 성벽 아래를 안전하게 공격할 수 있었으며 성벽에 천장을 만드는 주랑을 함께 겸비하면서 곡사로 날아오는 화살 공격으로부터 방어자들을 지킬 수 있게 디자인되었습니다.
이러한 호딩의 유용성은 수많은 전투로 증명되었으며 이후 호딩은 마시쿨리(Machicoulis)라 불리는 성벽과 일체화된 석조 구조물로 발전하게 됩니다.
성형 요새 - Bastion Fort
성벽이 발전하면서 견고함은 뚫을 수 없는 산과 같은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투석기가 발전한다 하더라도 던지는 힘에 있어서 한계점이 명확했으며 이 때문에 공성전은 성벽을 무너뜨리기보다는 성벽을 넘어가거나 성문을 돌파하거나 적들이 항복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그리고 사석포라 불리는 공성포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성벽은 방어의 의미를 상실하고 예외 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데뷔한 오스만의 우르반 대포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무너뜨림으로서 공성전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고 투석기가 공성포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격렬하게 발생한 지역이 이탈리아였으며 15세기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지도자들은 대포를 막아낼 수 있는 요새를 기술자들에게 요구했고 성형 요새가 탄생하게 됩니다.
극한의 경사장갑과 사각을 제거한 포루는 성형 요새의 특징입니다.
그 모양이 별을 닮았다 하여 성형요새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적과 아군의 포격을 가장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습니다.
포탄을 방어하는데 최적화된 디자인과 아군이 사격하는데 있어 사각을 제거하고 각 포루가 교차포격을 하여 적을 저지하는데 특화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높아지던 성벽은 다시 낮아졌으며 포탄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돌을 쌓아 올리던 방식에서 다시금 외벽은 벽돌을 쌓고 내부는 흙을 채워 넣는 성벽이 등장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공법을 한국에서는 외축내탁이라 하여 수원 화성이 이와 같은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성벽 앞에 포탄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보루를 쌓아 올렸으며 보루와 성벽 사이에 해자를 파냈고 가능하다면 물을 채워 적이 성벽을 타고 오르는 것을 저지했습니다.
또한 대포를 포루에 올려 적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공격자들은 요새포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참호를 파내거나 사거리 밖에서 대기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통 수성 측의 대포 사거리를 벗어나면 공격자도 대포 사거리가 부족해 공성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성 난이도는 급격히 올라갔으며 곡사포와 고폭탄이 등장하기 전까지 성의 수명은 연장되게 됩니다.
앞서 공성에 대한 이야기에서 성의 가장 약한 부분은 성문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공성측은 공성추를 사용하여 성문을 돌파하는데 전력을 집중했고 수성 측은 공격자를 저지하기 위해 전념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축조에서 옹성이라 불리는 구조물로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이처럼 성벽의 부속과 디자인을 통한 기능적 발전을 넘어서 배치에 따른 방어 역량의 변화 역시 눈여겨볼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옹성이 있다면 공성추는 첫 성문을 부수더라도 다음 성문에서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고, 적들은 성문을 관통하더라도 다음 성문에 막혀 돈좌될 것입니다.
동양 역시 시대와 환경에 맞춰 독특한 방식으로 방어를 구상한 흔적이 엿보이는 성들이 존재합니다. 차후 한번 더 성에 대한 내용들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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