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에 기록된 사건들을 살펴보며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옛 사람들을 공과에 따라 평가하곤 합니다.
조선의 부흥기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그렇고 전국토가 유린당하던 시절의 선조와 인조가 그렇습니다.
공과로 과거의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공과는 분명하며 당대인들이 기록한 문건과 후인들이 평가한 글귀가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뿐인 역사를 보다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 시대를 기준삼아 역지사지(易地思之)로 그들이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고민해 보는 겁니다. 인과(因果)라는 말처럼 모든 사건과 인물들의 행동과 결과에는 비롯되는 원인이 존재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생각과 환경에서 그러한 판단을 했는지 생각한다면 옛 사람들의 업적과 과오에 대해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 대해 보다 깊은 배움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들을 향해 약간의 이해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코끼리를 보고 싶을 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인터넷에 접속합니다. 좀 더 실감나게 경험하고 싶으면 동물원을 방문할 수도 있고 돈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비행기를 타고 인도나 아프리카로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허나 조선시대 사람이 코끼리를 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목숨을 건 도전이나 다름없습니다. 시기상 운이 좋다면 태종(1416) 시절 무로마치 막부의 원의지가 코끼리를 선물로 바쳤을 때 근처에서 볼 수도 있을겁니다.
-코끼리는 신기했으나 지나치게 많은 곡식을 먹었고 돈 나가는 구멍이었던 코끼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조정은 유교적 사고관에 따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 시기가 아니라면 해적, 전염병, 태풍을 감수하고 황해에서 출발하여 중국해, 말라카 해협, 버마해를 거쳐 뱅골만에 도착해야 하는 수십일간의 여정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바닷길이 싫다면 말이나 나귀에 몸을 맡겨 요동을 지나 중국을 가로지르고 티벳 사막 혹은 버마의 정글을 거쳐 최종적으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 수백일간의 목숨을 건 여정을 완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고난을 보면 카락선으로 세계를 일주한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그 선원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가 그렇고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끝없는 질주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아시아까지 성큼 다가와 종래에는 우리를 압도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서양은 바다로 나가 신항로를 개척하여 제국주의로 뻗어 나가는 발판을 마련했고 동양은 해금령을 내리면서까지 바다를 봉쇄하고 무역을 통제하다가 결국 그들에게 패권을 넘겨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만 보고 그들을 판단하기에는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15세기까지 명나라는 단신으로 경제와 군사 측면에서 유럽 대륙을 압도하는 상황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제국이었으며 동아시아는 중세의 4대 발명품인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판을 모두 발명한 부흥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조선도 유럽 사이에 끼워두면 만만치 않은 체급을 지닌 강국이었습니다.-
실크로드라 하여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무역로가 있었고 이슬람 상인들로 하여금 말라카 해협의 바닷길을 통해 인도, 중동, 아프리카, 유럽의 존재를 알고 교류하던 아시아였습니다.
명나라 초기 시절에는 27,000여 명의 선원들과 300여 척이 넘는 보선으로 출발한 정화의 원정대는 4척의 범선과 170명의 선원으로 리스본을 출발한 바스쿠 다 가마보다 약 100년은 앞서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습니다.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빼앗던 포르투갈의 원정대와는 달리 바다의 해적들을 제압하고 각국의 분쟁을 중재했으며 메카에서 참배를 하고 케냐에서 기린을 싣고 수많은 왕국들의 사절들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유럽과 중국이 접촉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럽의 상인들이 무역을 하고자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충분한 은을 지불한다면 찻잎, 도자기, 비단 등 상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세계의 은이 모두 중국으로 향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시장과 경제력은 아편 전쟁이 터질때까지 중국의 신비스러운 동양 패권을 유지시켜 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드러난 중국의 실체는 침략자들조차 당황할 정도의 이빨조차 없는 종이호랑이였습니다. 허상으로 이루어진 동방의 잠룡은 연기처럼 흩어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결과를 만든 복합적인 문명의 갈림길 요소들을 이야기해 볼 생각입니다.
제국의 유산
양측이 서로 다른 길을 간 이유는 그보다 더 먼 과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양은 통일 로마(BC.27-AD.395) 시대에 수많은 문화와 과학적 발전을 이룩했으나 이민족들의 침략과 내부적 분열로 제국이 무너지면서 로마가 사분오열되고 수많은 국가들이 탄생했습니다.
동로마는 분열을 수습하고 제국의 모습을 유지하여 패권을 유지했으나 서로마는 이민족의 준동과 유입, 투쟁, 분열 그리고 봉건제와 기독교라 불리는 거대한 문화적 국면을 맞이하며 진통을 겪기 시작합니다.
로마는 통일 제국의 왕관을 남겨 통치자들의 결승선을 만들었지만 수많은 민족을 하나로 묶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 불리는 무형의 연합을 남겨 유럽인들을 무의식 속에서 하나로 묶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가 유럽에 남긴 가장 큰 유산 중 하나입니다. 유럽은 분열되어 끊임없이 경쟁했으나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단어 하나로 공감대를 형성하여 서로 연결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성 로마라는 통일 제국을 만들 수도 있었으나 진정한 신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을 계몽하고 교화시켜 영광스럽고 독립된 기독교도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로마가 남긴 기독교는 유럽이 세계로 확장하는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엔리케가 아프리카를 탐험할 때,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할 때, 그들은 프레스터 존의 기독교 왕국을 찾아 나섰고 외부적으로 끊임없이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이는 유럽이 아시아를 넘어서는 대항해시대의 씨앗이 됩니다.
같은 시기 동양에서는 한나라(BC.206-AD.220)가 진나라의 뒤를 이어 중국을 통일한 제국으로 군림합니다. 중국의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하였고 토착 중국인들을 한족이라 명할 정도로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들은 주나라에서 계승한 종법제와 봉건제를 발전시켜 전제군주제를 설립하였고 유교를 바탕으로 율령을 정비하고 선포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핵심적인 뿌리를 구축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나라 또한 분열되고 삼국지로 유명한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를 열었지만 한나라는 민족들에게 중화사상과 통일이라는 가치관을 심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군주, 하나의 천자, 하나의 중국이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중국은 다시금 분열된 민족들을 흡수하여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통일을 반복하였고 송나라(AD.916-1279) 시대에 완전한 통일 중국이 등장합니다.
과거 제도를 통해 실력으로 관리를 선발하고 수많은 발명품이 탄생하고 문화적 향락이 넘쳐흘렀으며 절대적인 권력과 충성 그리고 수천년에 걸쳐 쌓아 올린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이라는 무시무시한 시장을 견고히 구축합니다.
-과거제는 선교사를 통해 서양에 전해져 채용 시스템을 개선하는데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조선의 정치 모티브 역시 송나라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두 제국은 엄청난 위업을 남겼습니다.
로마는 유럽을 기독교로 묶어 각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한나라는 철저한 관료제를 바탕으로 중국인들을 중화사상으로 묶어 통일 제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저는 첫 번째 갈림길이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봉건 제도의 차이
번역 문제로 동일시되고 있지만 유럽과 동양의 봉건제는 개념과 경험에서 큰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럽의 봉건제(Feudalism)는 로마 제국이 분열된 이후 효율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관리하기 위해 프랑크 제국(Regnum Francorum)에서 이민족 출신의 군인들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군역을 지는 로마의 은대지 제도(Beneficium)와 전사 계급인 종사들이 주군의 전투에 참여하고 전리품을 분배받는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Gefolgschaft)를 결합하여 만든 통치 시스템입니다.
주군이 가신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그 대가로 군역을 받기 때문에 절대적인 충성이 요구될 것 같지만 상호 존중과 평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계약 체계였습니다.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주군이 가신에게 영토를 하사하고 그 대가로 세금과 군사를 지원받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영토를 하사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고 영토는 한정적입니다.
프랑크 제국은 이러한 기조를 바탕으로 외부의 부족장들에게 봉신 계약을 제안합니다. 그건 서로 힘들게 싸우지 말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면 작위를 하사하고 영토의 주권을 인정해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프랑크 제국은 이러한 방법으로 빠르게 영토를 확장했으며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임을 선포하여 명분과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봉건 왕국은 군사적인 지원이 필요할 때 내부에서 연합군을 결성하여 서로를 지원하였으며 서로가 의무를 이행하는 쌍무계약의 군신 관계가 됩니다.
주군과 가신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각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책임을 물어야 했으며 시스템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견제하고 성장하기 위해 수많은 동맹이 탄생하고 분열하여 거미줄처럼 얽힌 국제 정세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동맹과 분열에 박차를 가한 것은 로마에서 독립한 이민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분할 상속법입니다. 이들은 자손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분할 상속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드는 재산을 늘리기 위해 전쟁과 동맹은 필연적으로 따라왔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기반으로 유럽의 봉건제는 수백년에 걸쳐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보완하는 계약과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자유의 가치관을 유럽인들에게 심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먼 시기, 동양은 주(周)나라(BC.1100-256)에서 봉건제(封建制)가 탄생했습니다.
먼저 이들은 종법제도(宗法制度)라는 특별한 장자 상속법을 만들어 분열 없이 가문의 권력을 상속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장자가 가문의 대종이 되어 모든 권리와 책임을 도맡고 둘째부터는 소종이라 하여 장자를 보필하는 구조입니다.
이후 종법제를 바탕으로 봉건제가 완성되었으며 대종인 장자는 곧 천자가 되어 제국을 다스리고 영토를 분봉받은 소종인 친족들은 제후가 되어 충성을 맹세하는 상명하복 기치가 탄생합니다. 이는 중국뿐만이 아닌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문화적 뿌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문화적 바탕을 기반으로 혈연중심의 군신 관계가 만들어졌으며 종법제에 따라 천자의 제후들은 자신의 아래 다시금 친족을 임명하는 것으로 피로 이어진 강력한 사슬이 완성되었습니다.
권력을 바탕으로 사회가 안정화되자 이들은 주역이라 불리는 기록물에 자신들의 정수를 담아 공자라는 인물을 계몽하여 유교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유교의 탄생은 가족 구성원 중심 사회에서 국가 중심 집단으로 확장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군주가 의무를 저버리면 끌어내려 새로운 군주를 세우는 유교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주나라의 혈연중심 사회를 벗어난 반증이며 분열을 통한 독립이 아닌 집단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목적을 띄고 있어 한층 더 견고한 사회구조를 만드는데 기여했습니다.
이렇게 유교를 바탕으로 집단을 중시하는 질서의 가치관이 동양 사람들에게 심어졌습니다.
서양은 계약을 중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가치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동양은 혈연과 유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단과 질서의 가치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갈림길이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몽골의 준동
세간에는 칭기즈칸이 지구온난화를 200년을 늦춰 주었다는 평가를 할 정도로 당대 몽골은 문명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파괴적인 육지의 쓰나미였습니다.
반면 몽골의 준동은 머나먼 유럽에게 있어 새로운 변화를 향하는 국면을 일으키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잦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내부적 회의론에 따라 이슬람에 대적하여 내부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던 유럽은 다시금 분열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258년 동방에서 등장한 몽골 제국군에 의해 아바스 왕조가 멸망하고 일 칸국이 탄생하였고 강대하던 이슬람 세력이 급속도로 무너지자 유럽은 뜻밖의 이득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동유럽과 이슬람의 군주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몽골군에 경악하여 기독교 세력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러한 지원 요청은 가볍게 묵살되었습니다.
오히려 몽골의 영향력 밖에 있었던 서유럽과 중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주적을 파괴하는 몽골군을 프레스터 존이 세운 기독교 왕국의 신성군으로 오인할 정도로 우호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오지 않고 이슬람 세력을 파괴했으니 사실상 그들의 정체는 상관없는 셈이 아닐까 싶습니다.
프랑스와 교황은 선교사를 포함한 사절단을 보냈으며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 또한 이 시기에 실크로드를 거쳐 원나라에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관은 오스만이라 불리는 강력한 이슬람 대제국의 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바스 왕조가 몽골군에 의해 몰락하고 일 칸국이 세워지며 중동은 투쟁과 분열이 난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 칸국이 사후 없이 분열되자 기회를 틈탄 오스만이 주변국들을 빠르게 병합하였고 세력을 키워 최신 무기인 대포를 가지고 동로마를 침공하여 정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동로마가 몰락하자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슬람을 피해 가까운 이탈리아로 도망쳤습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유럽이 세계 패권을 쟁취하는데 있어 뿌리가 되는 일들이 연달아 발생합니다. 동로마의 지식층이 가져온 그리스의 정수를 바탕으로 르네상스가 발발하였고 지중해 무역을 바탕으로 상업과 문화 그리고 기술이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이후 오스만이 동방무역로를 통제하고 유럽의 상권을 위협하자 곧 바닷길을 통한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는 대항해시대가 펼쳐지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 몽골의 준동은 동아시아에 있어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송나라는 기본적으로 주변국들과 무역과 조공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고 간계를 사용하여 유목민들을 분열하고 포섭하는 여러 술책을 사용하여 새로운 세력을 통제해 왔습니다.
그건 북쪽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상대하는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라에서 요구하는 조공량이 점점 늘어나 마찰이 많아지면서 문제를 처리할 방법이 필요했고 거란에 눌려 살던 여진족들이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발흥하여 세운 금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차도살인이라 하여 유목민을 사용하여 유목민을 멸망시켰으니 이제 남은 유목민인 금나라를 처리하기 위해 배신했으나 안일한 방식과 방심으로 인하여 송나라가 대패하였고 분노한 유목민에게 황제를 빼앗기는 정강의 변이 발생하여 중국은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송나라는 북부 절반을 잃고 남송으로 교체되었으며 급격히 성장한 금나라는 내부 안정을 위해 현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요나라와 금나라는 유목민족 출신이기에 유목민족이 뭉치면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 역시 유목민을 분열하고 회유하여 안정을 유지하는 스탠스를 취해 왔으나 요나라가 몰락하고 금나라가 내부 안정을 위해 소란해지자 대초원 너머 보르지긴이라 불리는 몽골 세력이 유목민들을 병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은 것은 몽골 제국이 세운 원나라 하나 뿐이었습니다.
송나라와 그 이전에 있었던 기술적 문화적 진보는 모두 불살라졌으며 칸의 야망인 정복전쟁을 향해 쥐어짜이게 됩니다.
이후 주원장이 몽골을 내쫓고 명나라를 건국하며 중국의 외교 스탠스는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가의 난, 정강의 변, 토목의 변을 통해 유목민에게 황제를 빼앗기고 국토를 짓밟힌 역사가 있기에 치욕을 반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한 때 수백 척의 보선과 수만 명의 선원으로 이루어진 정화의 원정대를 통해 아프리카까지 그 영향력을 투사하기도 했지만 북쪽의 유목민과 바다의 왜구는 덮어놓고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협적이었습니다.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스탠스로 해금령을 내려 왜구와 일본을 통제하였고 두 번째 몽골의 탄생을 막기 위해 상업을 통제하고 제한하며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투사하여 불사르는 방법으로 유목민들을 분열시키고 회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누르하치의 궐기를 막지 못하고 청나라가 탄생했으며 이후 유럽에 의해 강제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 번째 갈림길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발전의 여지없이 끊임없이 국력을 소모하게 만드는 외부적 요인은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마지막 요인으로 판단하기에 적합하다 생각했습니다.
유목민족의 준동은 동아시아의 국력을 지속적으로 소모시키면서 쇄국 정책을 유지하는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가 무력하게 구경만 한 것은 아닙니다. 차후 역사에 따라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정복당하고 청나라로 변화하게 되지만 서구와의 교역을 통해 수입한 캘버린을 자체 제작하여 개량하고 있었고 신식 군대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급변하는 환경으로 수년에 걸친 흉작이 반복되었고 암군들의 등장과 불완전한 시스템으로 누적된 사회질서의 붕괴로 발생한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는 뒤집어진 상태였습니다.
든든한 우방이었던 조선 또한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후금에게 순식간에 대패하고 점령당했기에 견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면을 보면 사건은 우연처럼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쌓아 올려진 역사가 역사를 만드는 순환적인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 쌓여진 시간과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사람은 한걸음 내딛으며 우리가 운명이라 말하고 때로 행운이라 부르며 가끔 기적이라 칭하는 사건을 만들기 위해 무수한 실패 속에서도 끊임없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기록된 사건들을 살펴보며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옛 사람들을 공과에 따라 평가하곤 합니다.
궐기 속에서 일어나 태평성대를 맞이하며 고난을 겪고 다시금 무너지는 역사들 속에서 좋았던 시절과 나쁜 시절을 구분짓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 그렇듯 항상 찬란한 순간만 지니고 있는 역사는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면 보다 더 선명한 해상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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