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리그 오브 레전드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아케인이 나오면서 펑크 장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습니다.
작년에는 사이버펑크 2077이 등장하면서 해당 장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드문 경우는 아닙니다. AAA급 컨텐츠가 나올 때면 항상 뼛속까지 해체되어 이슈가 되곤 했으니까요.
아케인에서는 마법 공학이 발달한 아케인 펑크를 그렸고 사이버펑크는 전자기술이 발달한 사이버 펑크를 그렸습니다.
펑크 장르는 이 외에도 다양합니다.
증기기관이 발달된 세계를 그린 스팀 펑크, 디젤 기관이 발달된 세계인 디젤 펑크, 핵 기술이 발달된 아톰 펑크와 바이오 기술이 발달된 바이오 펑크.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정 기술이 발달한 세계관을 그리면 해당 기술의 이름을 붙여 펑크라고 소개해도 되는구나?
아닙니다. 특정 기술이 발달한 세계를 그린다고 모두 펑크 장르로 인정받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가 나는 ~펑크다! 자칭한다 해도 모든 펑크 장르에서 공유하는 핵심적인 사상을 이야기에 담아 관통하지 않으면 그건 펑크가 아닌 그저 판타지로 남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케인은 확실한 펑크를 보여 주었습니다.
-사이버펑크 2077은 펑크를 보여주려 했지만 스토리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은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진심으로 감탄만 나왔습니다.-
오늘은 펑크 장르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 생각입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다양한 펑크 장르를 이해하려면 먼저 가장 근본이 되는 펑크(punk) 장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20세기 중반 권위적인 사회 시스템에 외면받은 영국, 미국의 젊은이들은 사회에 대한 반항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음악을 만들게 되고 이를 펑크라 부르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너저분하고 무질서한 분위기, 거칠고 날카로운 인상,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모습, 그리고 기존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해방되고자 하는 아나키스트적인 움직임은 곧 반사회적인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펑크는 요점만 이야기하자면 말 그대로 사회에 대한 저항 혹은 표현입니다.
대립되고 충돌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게 펑크가 지향하는 심볼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기조를 따라 많은 펑크 장르들은 인류가 가지 않은 길을 그려낸 다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대립되는 시대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표적인 펑크 장르들을 살펴보면서 어떤 명암을 품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팀펑크
펑크 장르들 중에서도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스팀 펑크입니다.
증기기관이 태동하기 시작한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황금처럼 반짝이는 파이프라인, 증기를 뿜어내는 거대 기계장치, 벨 에포크라 불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밝은 분위기가 특징입니다.
기억에 남는 영화로는 윌 스미스가 등장한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와 게임으로는 바이오쇼크3 인피니트의 컬럼비아, 그리고 디스코 엘리시움이 있습니다.
스팀펑크는 역사적으로 많은 상징들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산업 혁명으로 인류의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대량 생산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바람 없이도 대양을 건널 수 있고 지치지 않고 대륙을 질주할 수 있으며 하루에 한 층씩 건물의 높이를 올리고 매일 인류 진보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러한 현실은 몽상가들로 하여금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미래를 그리게 해 주었습니다.
종교와 예술, 모험과 낭만의 시대가 접어들고 과학과 망치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모든 사람들이 넘쳐나는 생산품으로 배부르고 따뜻하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 꾸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산업 혁명의 어두운 현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공장으로 보내지고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은 싼 값에 고된 노동을 합니다. 이들은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매를 맞으며 일을 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부자들은 계속 부를 채워 나가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끝도 없이 굶주립니다. 제국주의는 멈출 줄 모르고 뻗어나가고 있으며 인종 차별이 만연해 있습니다.
분명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풍요가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기계장치가 획기적으로 발전했지만 사람이 기계처럼 다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스팀 펑크에서 펑크는 보통 노동자들의 분노, 인종 차별, 가난과 억압,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스팀펑크의 펑크적인 대적점, 어두운 면은 이러한 현실에서 기인합니다.
디젤펑크
디젤 펑크는 강철과 기름, 내연기관이 가장 발달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따뜻하고 희망찬 느낌의 스팀펑크와는 달리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를 품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스팀펑크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고 핵 기술이 특화된 아톰 펑크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세계대전이 두방이나 터졌습니다.
거대한 건축, 진공관의 등장, 내연기관의 발전, 자동차와 비행기의 상용화, 무수히 많은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세계가 전화에 휩싸이는 엄청난 암흑기가 함께 도래한 시기입니다.
세계대전과 겹치는 우울한 시대상 때문에 디젤 펑크는 보통 전쟁, 세기말 장르로 많이 등장합니다.
인상적인 영화로는 매드맥스, 게임으로는 레드얼럿2와 아이언 하베스트, 바이오쇼크 1~2 편이 있습니다.
거대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던 만큼 수많은 이념들, 대공황, 독가스, 거함거포주의, 니콜라 테슬라의 코일, 잠수함과 전투기, 도전적인 전차들, 화학전 개념등이 디젤 펑크의 특징으로 등장하며
짙은 방독면과 마스크를 쓰고 초강대국들의 미래적인 기술들이 차가운 강철과 기름에 접목되어 인간미가 없는 무자비한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디젤 펑크는 스팀펑크와 비슷하게 기술의 발전으로 미래를 그리고 있으면서 같은 고통을 연장선에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거대한 전쟁과 이념적 충돌 때문에 더욱 각박해졌으며, 기술은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내는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처럼 죽어나가는 전쟁으로 마냥 밝지 않은 시대기에 디젤 펑크의 펑크적인 요소는 기술을 향해 겨누어져 있습니다.
더욱 거칠게, 차갑게, 획기적이면서 끔찍하게, 이게 사람을 죽이려고 발전한 기술이다.
-그런데 그런 극단적인 표현이 또 디젤 펑크의 매력 요소입니다.-
공공의 적을 물리치고 세계 평화를 지킨다는 희망찬 신념이 있지만 산업혁명 시절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사회적 불안과 패배에 대한 절망 때문에 디젤 펑크에서는 이처럼 미래적이면서 기괴하고 섬뜩한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아톰펑크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의 시대가 끝나고 핵분열의 시대가 왔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배기가스도 없고 코딱지만 한 자원으로 석유 수백 배럴의 힘을 내는 무한에 가까운 태양의 에너지 핵기술이 발달한 미래를 그려낸 것이 바로 아톰 펑크입니다.
미국에는 아름다운 번영과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 걸어야 하는 왕도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치는 패배했고 독일은 분열했으니 아톰 펑크의 시대상은 어떤 것을 품고 있을까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대립. 냉전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련이라 불리는 유라시아의 초강대국이 미국의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랜드리스를 받으며 함께 전쟁을 치르던 미국의 우방국이었지만 서로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기에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 그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앞서 나온 비효율적인 무기를 내다 버리고 핵폭탄이라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무기가 등장했지만 걱정 또한 산더미입니다. 소련 역시 수백 수천발의 핵무기를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는 언제나 체제 전복을 노리며 스파이들을 투입하고 있으며 쿠바에는 소련의 핵 미사일이 배치되어 미국을 겨냥하기 직전입니다.
분명 전쟁이 발발한다면 우리 모두 멸망의 길을 걸을 것이 자명해 보입니다.
아톰 펑크의 시대상은 이렇습니다.
번영과 희망이 가득한 미국의 60~8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그 어두운 일면에는 냉전으로 인한 비밀 스파이, 정부 주도하에 펼쳐지는 음모론,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반대로 아토믹 하트와 같이 소련을 배경으로 삼은 장르도 존재합니다. 웃긴 점은 당시 있었던 많은 미국의 음모론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핵이라는 무자비한 무기 때문에 아톰 펑크는 게임 폴아웃 시리즈처럼 보통 핵전쟁 이후의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접적인 핵 공포를 표현하기보다는 이미 저질러 버리고 망가진 사회를 보여주는게 더 임팩트 있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이버펑크
우리는 미래에 왔습니다.
수많은 기술적 진보가 삶의 영역으로 파고들어 인간과 하나가 되기 시작합니다.
플라스틱, 유리, 높이 뻗은 마천루와 홀로그램, 네온사인,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고도로 발달된 사이버 스페이스 가상세계, 거리를 걷는 로봇들은 물론, 기계화된 강화 인간까지.
인상적인 컨텐츠는 블레이드 러너, 얼터드 카본, 게임으로는 사이버펑크2077이 있습니다.
-사펑은 말이 많지만 아트 표현은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념들이 사라지고 공산주의는 무너졌으며 최종적으로 달러가 승리했습니다.
돈이 세상의 지배자이며 기업들은 새로운 신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돈만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질병과 장애를 극복했으며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종교는 진정 쇠퇴했으며 과학은 우리의 삶 속 깊숙하게 파고들어 말 그대로 뇌 속에 칩을 심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버펑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비추고 있기 때문에 그 어두운 단면은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권리, 도덕의 붕괴, 부정부패와 환경오염, 마약과 소외계층의 외면...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는 극단적으로 치닫고 치명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이버 펑크에서는 단순히 삶의 질뿐만이 아닌 철학적인 이슈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트랜스 휴머니즘이 추앙받는 세계에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에서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무엇을 되돌아봐야 하는지 묻기도 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슈는 자아를 가진 로봇은 존중받아야 하는가? 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이슈는 필연적으로 인류가 거쳐 가야할 문제이기 때문에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합니다.
많은 펑크 장르들이 인간이 가지 않은 길을 통해 다양한 기술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루는 이슈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펑크 장르의 특징은 기술적 발전으로 풍요를 누리는 세상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대척점에 있는 외면받는 세상을 함께 조명함으로서 세상이 가진 문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스템을 향해 저항하는 매력 있는 캐릭터들, 시나리오, 연출은 때로는 진지하게, 유머러스하게, 고독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지만
거대한 문제의 중심에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벽을 무너트리고 돌파해 나가는 모습은 제가 펑크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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