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Maid)'는 굉장히 선호도가 높은 소재 중 하나입니다.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 등 컨텐츠 속의 많은 메이드는 흑백톤의 단정한 복장과 프릴이 달린 레이스 치마를 입고 집안일을 전담하거나 서포트를 하는 직업으로 표현됩니다.
유럽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 속에서 심심치않게 등장하곤 하며 심부름부터 집안일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지만 고용주와의 관계를 통해 섹슈얼리티를 품은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일본의 영향으로 서브컬쳐 장르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핵심 소재중 하나이며 복장, 능력, 성격이 조합된 다양한 개성을 품은 모습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평범하게 시중을 드는 메이드, 못 하는게 없는 만능 메이드, 잘 하는게 없는 덜렁이 메이드, 원래 메이드가 아닌데 약점 잡혀서 일하는 메이드, 취미로 하는 메이드, 전투 메이드, 강제 변신 메이드...
여기에 인물들의 개성있는 성격이 조합되면 시너지를 일으키거나 신선함, 혹은 진부함을 유발하기도 하며 몇몇 캐릭터들은 왜 메이드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메이드는 그 단어 자체로 하녀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단순히 집안일을 하는 직업이 아닌 체계적이고 분업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오늘은 그런 메이드에 대해 알아볼 생각입니다.
메이드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직업입니다.
그 이전에도 여성 하인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미지(흑백의 유니폼)가 자리 잡은 것은 영국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었던 '빅토리아 시대'였으며 비슷한 다른 말로는 하녀, 가정부가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Great Britain no time to lose)'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말과 같이 산업 혁명을 통해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번영을 이루고 신분을 넘어 부를 쌓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으나 신분제가 자리잡은 영국에서 돈만으로는 상류층들의 사회에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곧 상류층과 섞이고 싶었던 이들에게 스스로를 과시하는 '스노비즘(snobbism)'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스노비즘에 해당하는 이들은 영국의 중산층인 '젠트리'와 '요먼' 계급입니다. 단순히 돈이 많은 평민을 의미하는 요먼과는 달리 젠트리는 보다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영국의 작위법상 귀족은 작위를 가진 자여만 귀족이 될 수 있으며 작위는 장남만 계승할 수 있습니다.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작위를 받지 못한 이들은 평민 계급과는 차별화된 젠트리라는 계급이 되어 활동했습니다.
이 때문에 젠트리는 단순한 평민으로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귀족과 결혼을 하여 신분이 상승하기도 하고 사회의 고위직에 올라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위법은 귀족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영국의 귀족은 그 수가 많지 않았고 전쟁이 한번 벌어질 때면 살을 도려내듯이 귀족 가문이 대량으로 증발하곤 했습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 '장미전쟁'으로 귀족의 수가 적어지면서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린 '젠트리'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도 변화하면서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평민들이나 도시의 유력 계층부터 이름을 날리는 직업까지 모두 '젠트리' 계급에 편입되었고 이후 영국은 젠트리들이 주도하는 사회가 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당시 영국의 계급 사회는 크게 4가지로 나누어집니다.
- 왕족과 귀족, 고위 성직자들을 의미하는 '상위 계급(Upper Class)'
- 젠트리, 요먼, 숙련된 노동자들을 의미하는 '중간 계급(Middle Class)'
- 일반 노동자들과 고용인, 서민들과 하류층들을 의미하는 '노동 계급(Working/Lower Class)'
- 그리고 노숙자, 고아, 실업자, 집시들을 의미한 '빈민층(Under Class)'
중간 계급이 아무리 돈을 벌고 명성을 날려도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지 못하면 상류층들의 무리에 낄 수 없었고 그들 역시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무리에 끼워 주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계급 구분은 사용하는 언어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상류층들은 '여왕의 언어(Queen's English)', 혹은 '상류층 발음(posh accent)'이라 하는 억양을 사용했고 서민들은 '코크니(Cockney)'라 불리는 억양으로 구분 짓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상류층들의 문화를 즐기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중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많은 수의 '남성 고용인'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행처럼 번져나가 돈을 좀 벌었다 싶은 이들은 너도나도 고용인들을 집안에 들여놓기 시작했고 미디어 컨텐츠에서 흔히 보이는 '부자 캐릭터'들이 대접받는 장면들은 이러한 현상에서 기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수요의 증가로 인해 남성 고용인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임금이 폭등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더해 1777년에 도입된 '고용인세'로 인하여 스노비즘을 추구하던 이들은 한 차례 타격을 받게 됩니다.
높은 임금과 세금으로 인하여 스노비즘을 추구하는 이들은 고용인세가 적용되지 않는 여성 고용인들을 뽑기 시작했고 여기서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빅토리안 메이드'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 재미있는 점은 고용인세는 남성 고용인을 뽑은 고용주에게만 세금을 부과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로 인하여 같은 스노비즘을 추구하더라도 남성 고용인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부의 척도를 계산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시녀 - Lady's Maid
레이디스 메이드는 여주인이나 딸들의 시중을 드는 메이드로 옷가지부터 화장, 장신구를 관리하고 최측근으로 활동하여 보좌하는 것이 주된 업무입니다.
미디어에서 흔히 등장하는 모습처럼 시녀는 그렇게 낮은 직위가 아닙니다.
자신이 서포트하는 고용주와 대화가 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특히 궁전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일반 시민들이 아닌 귀족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궁전이 아닌 곳도 크게 사정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평민의 신분으로 고용되는 레이디스 메이드들은 읽고, 쓰고, 화술이 능통해야 했으며, 기본적인 교육과정을 수료하거나 능력이 출중하고, 정직하고 입이 무겁고, 최신 트렌드에 민감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하우스키퍼가 아닌 안주인이 직접 고용했으며 별도의 관리를 받았지만 함께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메이드들과도 완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다른 하녀들에게 모함을 당해 쫒겨나거나 죽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우스키퍼 메이드 - HouseKeeper Maid
메이드가 대량으로 고용되다 보니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계급을 나누고 일을 분업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우스키퍼 메이드는 이들을 관리하는 가장 높은 계급이며 집사에 가까운 직무를 수행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들은 집안의 회계와 금고를 관리하고, 메이드와 요리사를 채용하는 인사 업무와 함께 여주인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집안의 모든 열쇠를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Mrs.라는 존칭으로 불렀습니다.
이들은 보통 메이드 직무의 최고참이자 근무 경력이 깊은 중년층으로 고용했으며 회계 업무를 봐야 했기 때문에 여러 능력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들의 복장은 주인보다 검소하고 유행에 한층 떨어지는 복식을 착용하여 주인을 돋보여야 했으며 최고참이라 할지라도 보통 계급상 평민이었기 때문에 중산 계급의 직업(가정교사, 시녀)들보다는 서열이 낮은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 이들 뿐만이 아닌 모든 고용인들은 고용주보다 검소하고 유행에 뒤떨어지는 복식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애당초 자기 자랑 하려고 뽑는 고용인인데 하인이 주인보다 잘나면...-
부엌 메이드 - Kitchen Maid
키친 메이드는 부엌에서 요리사의 보조를 맡는 메이드들입니다.
이들은 하우스키퍼 메이드에게 지시를 받지 않고 주방장에게 별도의 지시를 받았으며 실력을 인정받으면 요리사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경영을 담당하는 하우스키퍼와 요리를 담당하는 주방장이 집안일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밑에는 '스컬러리 메이드(Skulscullery Maid)'라 하여 수습 보조로 붙는 어린 메이드들이 있었는데 키친 메이드를 도와 설거지와 청소 같은 잡일을 담당했으며 어린 소녀가 처음 고용되면 스컬러리 메이드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우스 메이드 - House Maid
하우스 메이드는 집안의 청소와 정리정돈을 담당하는 가장 일반적인 메이드입니다.
이들은 하우스키퍼의 직할 메이드로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일을 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고용되는 저택이 클 수록 바쁜 삶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해가 뜨는 시간에 미리 기상하여 난로를 청소하고 불을 피우며, 기본적인 정리 정돈과 청소를 끝낸 뒤에 식사를 마쳤고 고용주들이 일어나서 밥을 먹을 때 그들의 방을 청소하며 오수를 갈거나 석탄과 장작을 보충했습니다.
오전의 모든 업무를 마치면 오후 복장으로 갈아입는데 오전에는 주로 궂은 일들을 미리 처리했기 때문에 옷이 더러워지기 쉬워 오전 복장과 오후 복장을 구분해서 입었습니다.
-유니폼의 경우 고용주마다 다르게 적용했지만 주로 검소하고 깔끔한 복장을 선호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면 은식기와 같은 비싼 가구들을 정리, 청소했으며 손님을 접대하거나 고용주의 심부름을 하고 티타임과 저녁 식사 준비를 도왔습니다.
화목 난로를 쓰는 특성상 재가 남기 때문에 청소가 자주 필요했는데 저녁이 될 때면 한번 더 난로를 청소하고 집안의 불을 교환하러 다녔습니다.
목욕물을 준비하고 침대 시트를 정리 했으며 가끔 파티가 열릴 때면 손님들을 접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일정 또한 강제적으로 조정되었습니다.
이들의 아래에는 '체임버 메이드(Chamber Maid)'가 존재하기도 했는데 하우스 메이드와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보다 궂은일들을 담당하는 메이드로 하우스와 체임버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곳도 있었지만 따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너스 메이드 - Nurse Maid
너스 메이드는 아이들의 보모 역할을 하는 메이드로서 고용주의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다른 메이드들과 따로 구분되기도 했습니다.
유모와는 다른 직업이지만 같은 일을 했으며 아이들이 성장하면 너스 메이드의 능력에 따라 기본적인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따로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교육을 했기 때문에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팔러 메이드 - Parlour Maid
팔러 메이드는 대외적인 활동을 위한 메이드입니다.
주로 손님들의 앞에서 보는 업무들을 담당했으며 어느 정도의 교양과 화술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은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고용주들의 간판과 같은 대외적인 이미지를 담당했습니다.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고용했으며 미디어에서 메이드가 가진 이미지와 가장 부합하는 모습이 바로 팔러 메이드라 할 수 있습니다.
메이드 오브 올 워크스 - Maid of all works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모든 잡일을 담당하는 1인 메이드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많은 메이드를 고용할 수 없었던 가정에서 주로 고용되었으며 이름처럼 올 워크스 혼자서 모든 메이드들의 업무를 도맡아 담당했습니다.
미디어에서 주로 등장하는 메이드는 팔러 메이드와 올 워크스가 합쳐진 경우가 많으며 혼자서 모든 일을 담당하지만 집이 작을수록 일의 양도 줄어들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올 워크스가 존재했습니다.
메이드라는 업무 자체는 고되기도 했지만 숙식 제공과 경력을 통한 노후보장은 당시 시대에 많은 여성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강력한 직업이었습니다.
-남성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을 그만둔다 하더라도 특기를 살려 창업을 하거나 다른 직종에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좋은 '추천장'을 받으면 보다 높은 임금을 받으며 좋은 근무지에서 일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추천장'은 이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서였는데 당시에는 신분과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아 메이드들은 이직을 할 때 전 주인의 소개장 혹은 추전장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해당 메이드의 경력을 확인하고 어떤 연유로 이직을 하게 됐는지를 아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추전장이 없는 메이드의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그림자 역시 짙게 베여 있었습니다.
추천장을 써 주는 것은 온전히 고용주의 몫이었기 때문에 메이드들은 고용주에게 폭력, 강간을 당하거나 임금을 체불당해도 쉽사리 항의할 수 없었고 추천장을 안 써주는 것은 물론, 잘못된 추천장이라도 받는 날에는 재취업이 불가능하기에 온갖 부조리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훔치는 건 예사고 냉장고의 음식을 빼먹는 일들도 잦았습니다. 업무능력의 문제가 있어 사고를 치거나 책임지지 않고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때문에 추천장은 더욱 중요해졌고 악습은 끝없이 순환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용주였던 귀족과 젠트리들이 몰락하고 청소기와 같은 가정제품의 발명으로 인력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하게 되면서 고용인이라는 직업 역시 위협받게 됩니다.
처음 스노비즘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고용인 부족 현상이 이제는 고용주 부족 현상으로 전도되면서 많은 메이드들이 실직하게 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제는 '메이드 테마'를 갖춘 장소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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