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서 갑옷은 여벌의 목숨처럼 중요한 장비입니다. 인체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연약해서 돌멩이 한방에 생사를 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투를 상상할 때 게임이나 픽션 속에서 등장하는 헐벗은 갑옷들과 피 흘리며 싸우는 영웅들 때문에 서로 공격을 교환하는 버티기 싸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한 번의 히트만으로도 사람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소울류의 게임들처럼 커다란 데미지를 입으면서 무기를 놓치거나 절뚝거리는 등 엄청난 디버프를 함께 받는 겁니다.
이러한 결과는 싸우는 사람에게 있어 엄청난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전투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싸울 수 있는 갑옷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이는 초보와 고수를 가리지 않았고 당대 소드마스터, 이탈리아의 마스터 중 하나인 '피오레 디 리베리' 또한 평복 결투는 일합으로 결판나기 때문에 평복 결투를 한번 하느니 갑옷을 입고 결투를 세 번 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러한 갑옷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총의 등장과 함께 기사의 몰락, 갑옷의 몰락 이야기를 디저트처럼 들어왔습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 소총인 M16의 운동 에너지는 1600J에 달합니다. 그리고 당시 머스킷은 현대 소총과 맞먹는 1500J의 운동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머스킷의 유효사거리 안에만 들어오면 보병이고 기병이고 모두 씹어먹을 정도로 강력한 데미지를 가할 수 있었고 기존의 무기와 비교해서 압도적인 무력은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옷이 항상 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갑옷의 몰락이라 말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시대와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는 갑옷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폴아웃의 파워 아머나 아이언맨의 마크 슈트가 나온다면 이 역시 갑옷에 대한 새로운 변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2~ 13세기 십자군의 장비입니다.
당시에는 총기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옷의 주요 목적은 창칼과 화살을 막아내는 용도였습니다.
특히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과 잦은 전투를 벌여야 했고 뜨거운 사막 환경에서 통풍이 잘 되며 그들의 '샴쉬르'를 막아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사슬 갑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복장의 구성으로는 갬비슨을 안에 입고 그 위로 사슬 갑옷, 서코트를 입은 형태입니다. 사실상 이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검, 창, 활 공격은 모두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트를 당하면 사슬이 분리되는 문제가 있었고 이후 사슬 갑옷은 리벳 연결식으로 발전함에 따라 더욱 보강된 방호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4 세기부터 이슬람 사회와 아시아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경번갑(Plate and mail)'과 '두정갑(Brigandine)'입니다.
'경번갑'은 사슬 갑옷에 철판을 결합시켜 만든 갑옷으로 사슬 갑옷의 장점인 통풍성을 가져오면서 기존 사슬 갑옷의 단점이었던 타격무기와 점 공격에 대한 방호력을 보강시킨 장비입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기후와 환경 때문에 풀 플레이트로의 갑옷 발전이 더뎠으며 그 전에 화약 무기가 전파되어 경번갑에서 마무리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풀 플레이트가 지니는 방호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랍의 군주들은 서양과 전투를 벌일 때면 무리를 해서라도 마갑까지 챙겨 입은 풀 플레이트로 군사를 무장하기도 했습니다.
'두정갑'은 '두석린갑(Scale armour, 어린갑)'의 발전형으로 가죽이나 질긴 섬유 안팎으로 '갑찰(철판)'을 붙여 '두정못(리벳)'으로 고정시킨 갑옷입니다.
기존의 찰갑은 히트를 당하면 연결된 찰갑이 함께 분리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두정갑은 찰갑을 옷에 고정함으로서 유지보수와 방호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습니다.
풀 플레이트의 경우 조선에서는 두정갑이 널리 사용된 14세기 말 이전부터 '고려의 최무선'을 통해 '승자총통'으로 화약무기가 보편화되어 있기도 했고 당시 동아시아의 환경과 상황에 맞춘 독트린으로 더 이상 갑옷을 진화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복합적인 요소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서구와 교류를 했던 다이묘들이 풀 플레이트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성비의 문제로 보편화되지 못했습니다. -
15~ 17 세기 동안 사용된 갑옷의 최종형 '풀 플레이트 아머'입니다. 크게 '고딕 양식'과 '밀라노 양식으로 구분 지으며 후기로 가면 화려한 고딕 양식보다 심플하고 효율적인 밀라노 양식이 장악하게 됩니다.
풀 플레이트는 단단한 강철판으로 온몸을 두르고, 약점이 될 수 있는 관절과 이음매 사이는 사슬 갑옷으로 착용자를 보호하고 있으며 갑옷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강력한 방호력과 높은 활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지간한 냉병기는 의미가 없었고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적을 자빠트리고 갑옷의 틈 사이로 칼을 찔러 넣는 '하프소딩'이나 '에스터크', '스틸레토' 같은 기술과 무기를 활용한 '대갑주검술'이 주류가 되어 쓰였습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풀 플레이트는 마상창 시합을 위한 '주스팅 갑옷(Jousting armour)'과 '막시밀리안 1세'가 주문 제작한 전용 갑옷이 있으며 화려하기로 치면 영국 그리니치 공방의 '그리니치 아머(Greenwich armour)'가 있습니다.
특히 주스팅 갑옷은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 장갑을 두텁게 만들고 그에 따라 무게도 무거워졌는데, 이 때문에 갑옷이 매우 무거워서 말에 오를때 도르레를 사용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박혀 있기도 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말이 하중을 견디는 것 부터 전시 환경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용되는 풀 플레이트가 20~30kg의 무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불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게를 전신으로 분산하여 받기 때문에 활동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달리기, 체조, 구르기는 물론 숙련된 사람이 입으면 수영까지 가능하며 풀 플레이트를 입고 헬스를 하는 외국인들의 영상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풀 플레이트의 방탄 성능을 살펴본다면 결코 약하지 않다 말할 수 있습니다.
화약 무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풀 플레이트가 '아퀘부스'를 튕겨낼 수 있었으며, '활'과 '쇠뇌'는 당연하게도 풀 플레이트를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머스킷의 경우 사거리에 따라 관통이 되거나 튕겨낼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아퀘부스보다 머스킷을 더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머스킷을 막아내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갑옷 장인들의 목표는 머스킷의 총탄을 막아내는 방탄 성능이 되었으며 이후 시대에 맞게 개량을 거듭하면서 머스킷은 물론이고 초기형 콜트 권총탄까지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성과를 보이게 됩니다.
16 세기에 들어서면 '머스킷'이 주력 병기로 자리잡으며 갑옷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머스킷의 등장으로 군 편제는 보병 중심으로 개편되었습니다. 따라서 보병들이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코르셀렛(Corselet)'이라 불리는 흉갑이 등장했습니다.
갑옷과 투구의 디자인 변화도 의미 있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탄을 튕겨내기 위해 중심이 튀어나온 경사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에서도 중요하게 고려되는 경사장갑에 해당됩니다.
또한 대량 생산을 위해 '연철(Iron)'로 갑옷을 만들었으며 납 총탄을 막기 위해 장갑의 두께를 늘렸습니다. 그들이 갑옷을 만들 때 의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연철은 강철보다 연성이 높아 납 총탄의 충격을 받아내고 튕겨내기에 훨씬 유리했습니다.
-당시 총알은 납으로 만들어져 있어 쉽게 찌그러지기 일쑤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냉단법과 분업화가 적극적으로 시행되면서 각국은 단단한 갑옷을 빠르게 양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일반 보병들도 코르셀렛이나 군수품 갑옷을 구매할 수 있었고 안정적으로 전장에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파이크와 머스킷 방진으로 기병들의 입지가 낮아지면서 기병 또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휠락'과 '플린트락'이 개발됨에 따라 기병들도 마상 사격이 가능해졌고 '흉갑기병(Cuirassier)'이라 불리는 총기병이 등장했습니다.
-초기 퀴레시어는 흉갑을 기본으로 모든 갑옷을 챙겨입었습니다. 하지만 그리브나 건틀릿이 총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점차 경무장으로 변화했으며 이후에는 버프 코트 위에 퀴레이스 아머를 걸쳐 입는 것으로 변화했습니다. -
이들은 '카라콜(Caracole)'이라 불리는 반회전 사격 전술로 적 전열에 접근해 권총 사격을 가하고 이탈하는 것으로 전열을 무너트렸고 뒤를 이은 창기병들이 적진을 붕괴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 하지만 보병 방진에 큰 효과를 주기는 어려웠고 오히려 같은 기병끼리 싸울 때 효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기병을 이긴 킹방진, 그리고 킹방진을 박살낸 갓포병... -
이러한 갑옷들은 성능을 입증하기 위해 '총알 자국(BulletProof)'이라 하여 갑옷 제작자가 테스트를 위해 직접 갑옷에 총을 쏴서 남는 자국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갑옷들이 머스킷을 막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고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국을 가짜로 만드는 업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총알 자국도 마냥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
아래 영상은 기병들이 주로 입던 '퀴레이스(Cuirass Armour)' 아머의 테스트 영상입니다.
-정중앙에 직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총탄을 튕겨냈지만 보호받지 못만 부위나 말이 피격당하면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16 세기 말에는 소가죽으로 만든 '버프 코트(Buff Coat)'가 등장합니다.
생선 기름에 재운 다음 말려서 강화시켰으며 그 때문에 독특한 비린내가 풍겼고 3kg 정도의 무게에 도검류는 물론이고 권총탄까지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가벼운 무게와 가격 대비 뛰어난 방어력 때문에 갑옷은 안 입더라도 버프 코트는 꼭 입고 다녔을 정도로 기병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주로 흉갑 아래에 보조 갑옷으로 입거나, 버프 코트만 입고 다니기도 했으며 부대나 군대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열 보병들의 등장과 함께 라인 배틀이 고착화되고 연대 개념이 자리 잡히면서 개개인의 사기 진작과 활동성을 위해 특색 있는 군복이 지급되었고 가성비의 문제로 보병들의 개인 갑옷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풀 플레이트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갑옷은 흉갑만이 남아 명맥을 이어 가다가 '나폴레옹 시대'에서 다시금 조명받았으며 '퀴레이서', '드라군', '후사르'와 같은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였지만 갑옷을 입고 전열 보병들과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갑옷을 믿고 싸우기에는 총포가 비약적으로 발달해 있었고 이들은 적들을 추격하거나 후방의 포병대를 노리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그렇게 갑옷은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고 정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1차 대전은 기관총이 데뷔함으로 기계를 사용한 대학살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무기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지만 군대의 독트린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로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기관총과 후방 포대에서 쏟아져내리는 무차별 포격, 비행기 폭격, 지독한 참호전과 탱크의 등장으로 모든 군대는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전장의 모습에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중 옛날에 쓰이던 갑옷을 꺼내 병사들에게 입히는 경우도 있었으며, 파편을 맞기 쉬운 전차병이나 포병, 때로는 보병들에게 급조한 갑옷을 입혀 전선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철판을 붙인 흉갑을 입고 메이스를 든 채 참호에 뛰어들기도 했고 상반신을 갑옷으로 두른 다음 기관총을 잡고 진지에서 사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파편을 막는 일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였지만 무기의 발달로 운이 좋아야 도탄이었고 직격탄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갑옷은 이렇게 저물었지만 '방탄 헬멧'만큼은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착용자를 보호했기에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쓰다보니 오늘 글은 유난히 주석이 많이 달린 것 같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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