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은 여러 컨텐츠에서 다양하게 활용됩니다.
세상을 누비며 사건을 해결하고 전투로 다져진 전우애가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있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평민들이 자수성가를 위해 용병대에 투신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로마 붕괴 이후 봉건제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권력은 아주 밀도 있게 세분화되었습니다.
잘게 쪼개진 만큼 세수는 줄었고 위협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영주들은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 양성한 사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으며 권리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기본적으로 군대는 돈 먹는 하마입니다. 옛 로마 시절에는 식민지를 통해 끊임없이 황금이 쏟아졌으나 대륙이 분열된 이후부터는 자급자족으로 전투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군대는 끊임없이 유지비용이 들어가며 평화가 찾아올 때는 경비나 치안 유지 외에는 쓸 곳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군주는 자신의 봉신들과 군대를 운용하는 부담을 나눠 가졌지만 철저한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따라 원하는 시기, 원하는 순간에 왕국의 전 병력을 소집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봉신들 역시 자신의 군대를 놀려 두자니 끊임없이 소모되는 비용이 아쉬워 전쟁을 찾아 나서야만 했습니다.
군주는 필요할 때만 쓸 수 있는 병사를 원합니다.
병사는 돈을 벌기 위해 전쟁을 찾아 나섭니다.
이러한 이유로 영주의 휘하에 따라 움직이는 용병대는 단순하게 유랑하는 무장 집단을 넘어서 보급대를 따로 운용하기도 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스위스의 경우 국가가 나서서 용병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용병은 먼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 시절부터 존재했고 역사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중세부터 시작된 용병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스위스, 란츠크네히트, 바랑기안, 제노바, 콘도티에로, 욤스비킹... 이러한 용병들은 봉건 사회가 수립된 이후 등장하기 시작하며 오랜 시간 동안 전쟁과 함께 성장해 나갔습니다.
서로마가 붕괴하고 봉건제가 자리를 잡으며 군주에게는 사병을 거느린 봉신들이 생겨났습니다. 계약에 따라 봉신은 불합리한 군주의 요청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고 정해진 기간 외에는 마음대로 소집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군 체계는 필연적으로 동원력의 약화를 불러왔습니다. 전쟁은 그런 사정들을 봐주지 않았기에 군주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할 때만 쓸 수 있는 전문적인 병사들을 원했고 자연스럽게 용병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반면 군대에 투자했으나 평화가 찾아온 영주들에게는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유지비용이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그렇다고 군대를 감축하자니 침략이 두렵고 놀려두니 돈이 아까웠습니다.
필연적으로 영주들은 타 국가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용병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군주는 질 좋은 병사를 구할 수 있었고 영주는 군대의 질적 상승과 더불어 비용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영주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용병으로 참전하는 일은 봉건제 초기 특징인 낮은 결속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후 중앙집권이 가속화되며 사라집니다. -
서로마가 붕괴되면서 땅을 가진 영주들만 남은 것은 아닙니다.
한때 로마 군단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이 남습니다. 땅이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용병에 투신합니다. 당시 유럽은 이렇게 모인 이들을 Company 라 불렀습니다.
함께라는 의미의 Com과 빵이라는 의미의 Pan이 어이진 것으로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의미했으며 이후 회사를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 잡습니다.
그 외에도 상속권이 없는 자녀들이 나누어 받은 재산으로 무장을 하고 용병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떠돌이 용병대를 넘어 유명세를 떨치고 이름을 남긴 용병대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스위스 용병대 (Reisläufer)
먼저 스위쳐 혹은 라이슬로이퍼라 불리며 용병들 중에서도 최고의 신용과 충성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스위스 용병대입니다.
1527년에 벌어진 '사코 디 로마' 당시 카를 5세가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고용주인 교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건이 유명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전히 바티칸의 경비는 스위스 용병이 담당하고 있으며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배경 또한 흥미롭습니다.
봉건제 이후 각 국가들이 중앙집권으로 변화하고 있을 때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는 하나로 뭉쳐 있지만 각 주마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초기 봉건제와 유사한 정치 구조는 타 국가에 논란 없이 용병을 빌려주기 편리한 환경이 되었습니다.
척박한 스위스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나라에서 용병업을 장려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투쟁하던 노하우와 험준한 스위스 환경에서 익힌 강인한 체력을 활용하여 스위스인들은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보병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할버드를 활용한 노련한 전술로 전장을 휩쓸고 다녔으며 역사적으로 증명된 신용과 충성으로 몰락할 때까지 가장 선호받는 용병대였습니다.
군주론에서 용병들을 까던 마키아벨리조차 스위스 용병대를 극찬할 정도로 이들의 신용도는 정점에 달해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럽의 봉건 사회는 쌍무계약입니다. 군주와 봉신은 언제든지 서로 돌아설 수 있었고 중앙집권화가 끝난 절대왕정이 등장할 때까지 이러한 풍조는 유지됩니다. 그런 사회에서 고용된 주인에게 죽음이 닥쳐도 충성을 유지하는 스위스 용병대는 통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스위스인들이 인정받는 또 다른 이유 중에는 질 나쁜 동업자들이 있었습니다.
용병들은 자신들의 목숨과 이익에 따라 움직였는데 싸우던 도중에도 상대 군주에게 회유되어 고용주를 찌를 수도 있었고 전장에서 같은 용병끼리는 암묵적으로 넘어가는등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용병들이 심했으며 마키아벨리가 용병들을 혐오하는 이유가 됩니다.
-보통 용병들 또한 스위스인들처럼 신용이 자신들의 가장 큰 재산임을 알고 있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위스 용병대는 고용된 주인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명령 이행을 보여주었습니다. 패배가 분명한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유랑하는 용병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지닌 신용이 무너지면 고향도 함께 무너진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도망치면 가족이 굶는다.' '도망치면 동료가 직장을 잃는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스위스인들은 전쟁에 나서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꼽았고 도망치는 것을 최대의 굴욕으로 삼아 상무 정신을 일종의 문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킬 것 같은 이들도 몰락을 하게 됩니다.
국가 주도하에 양산되어 선진 무기로 무장한 란츠크네히트에 밀려나게 되었지만 이들은 몰락하는 과정 속에서도 신용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싸웠고 스위스에서 용병 수출이 금지될 때까지 각국에서 꾸준하게 고용되었습니다.
란츠크네히트 (Landsknechts)
막시밀리안 1세가 스위스 용병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을 밴치마킹하여 탄생시킨 독일의 란츠크네히트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인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가 국가에서 창설한 용병대지만 돈을 주면 누구나 고용할 수 있었고 보다 자유로웠으며 자신들만의 합리적인 규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란츠크네히트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화려한 복장과 선진 무장, 노력한 만큼 봉급을 받는 돌격 수당과 숙련자를 우대하는 도펠죌트너,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결정권을 행사하는 병사 집회.
시작은 스위스 용병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끊임없이 성장하여 최종적으로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대를 꺾고 최강의 자리에 올라갑니다.
초창기 란츠크네히트의 구성원들은 남부 독일 지방의 사내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남부는 전통적으로 분할상속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영지는 점점 쪼개지고 마지막에는 나누어줄 땅이 사라집니다.
그 결과 첫째를 제외한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살 수밖에 없었고 도시의 난민이 되거나 마지막 희망으로 용병에 지원하게 되며 이후 시골, 농촌에서 올라온 이들을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라고 부르게 됩니다.
-land는 땅, 시골이라는 의미를 Knecht은 병사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무기로는 스위스 용병대를 밴치마킹한 만큼 파이크와 할버드를 주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숙련된 병사는 도펠죌트너라 하여 두 배의 봉급을 받고 쯔바이헨더를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대치중인 적들 사이로 파고들어가 장검을 휘두르며 창대를 부러뜨리고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맡곤 했습니다. 또한 선진 무기인 총을 사용하는데 적극적이었으며 복장에 있어서는 '슬래시 앤 퍼프'라 하여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황제의 명으로 창설되었지만 그 부대의 모집과 운영의 권리는 각각의 용병 대장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사조직처럼 굴러갔습니다.
인원을 모집할 때는 용병 대장들이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모아 각 장소로 보내 모병을 시키게 됩니다. 이들은 여러 선전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홍보했고 혹한 사람들은 서기 담당에게 서명을 하고 계약금을 받았습니다.
신병들은 받은 계약금을 가지고 열병지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기본 무기로 사용할 장창을 각자 지급받으며 비용은 계약금에서 제외됩니다.
란츠크네히트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용병 대장들이 운영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주축이 되었고 그런 병사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병사 집회'가 있어 수당은 가능한 공정하게 돌아갔습니다.
전투 시 앞장서서 돌격을 하면 받을 수 있는 돌격 수당, 약탈품의 공동 분배, 급료 미지급에 따른 항의와 숙련자를 우대하는 문화까지 있었으며 특히 다른 이들보다 높은 수당을 받을 수 있어 많은 이들이 란츠크네히트에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이들은 계약을 굉장히 까다롭게 챙겼습니다.
임금이 밀리면 결코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고용주가 임금을 지급할 생각이 없어 보이면 그 자리에서 명령을 어기고 모든 것들을 때려 부수고 약탈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스위스 용병들이 마지막까지 교황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사코 디 로마'이며, 카를 5세로부터 임금을 지급받지 못해 분노한 3만 5천의 란츠크네히트들이 성지 로마로 쳐들어가 모든 것들을 때려 부수고 교황청을 약탈한 사건입니다.
당시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인 카를 5세 황제의 명으로 용병대를 모집한 프룬츠베르크는 란츠크네히트를 운용할 비용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지급할 돈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그들을 통제하던 프룬츠베르크가 진군 도중에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자 용병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후 샤를 3세가 지휘권을 잡지만 그는 용병들의 강압적인 의견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로마로 진군을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샤를 3세가 전투 중에 사망하자 용병들을 막을 수 있는 모든 제약이 사라졌습니다. 용병들은 거침없이 로마로 진격하여 모든 것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약탈을 하는 과정 속에서도 임금이 제때 지불되지 않아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는 일도 다반사였고 지휘관들은 '병사 집회'로 결속된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황제 카를 5세는 로마 약탈에 당황하고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교황이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에 내심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고 상황이 심각하다고 인식한 이후에야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용병들이 주로 믿는 루터파는 구교가 사치스럽고 타락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과거 구교에서 루터파를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는 등 잔인하게 탄압한 사건이 있어 로마를 약탈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로마는 장장 아홉 달 동안 2/3의 인구가 도피하고 1만이 넘는 인구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바랑기안 친위대 (Varangian Guard)
동로마 제국의 바랑기안 친위대는 앞서 두 용병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이들은 노르만식 갑옷과 방패, 도끼로 무장하고 있으며 활과 검을 사용하는데도 능했고 전략적인 기동이 필요할 때는 말을 타기도 했습니다. 바랑인은 9~ 10세기에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바이킹 민족들을 말합니다. 고대 노르드어로 맹세를 의미하는 '바르'(vár)에서 유래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일대에 거주하는 노르만 인들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친위대로 고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잔틴 황제 '바실리오스 2세' 시절입니다.
976년, 황제는 '스클리로스 내전'을 겪고 충성스러운 용병들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후 987년 '포카스 내전'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키예프 공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6천 명의 바랑인들을 지원받게 되며 이후 아비도스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하며 절정의 시기를 다스리게 됩니다.
-다만 크킹으로 치면 외교력과 음모력이 0에 수렴했는데 치세동안 업적은 많으나 사랑받지 못한 황제였습니다.-
바이킹이라 불리며 항상 약탈만 할 것 같은 이미지의 북유럽 인들은 생각과는 달리 이국의 법을 존중했습니다.
반복된 반란에 지친 바실리오스 2세는 신하들을 불신하게 되었으며 '상무정신'과 노련한 전투 경험으로 무장한 바랑인들이 훨씬 믿음직스럽다고 느껴 그들을 본격적으로 고용하게 됩니다. 황제는 근위대로 복무하는 바랑인들을 예우해 주었으며 공훈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면 많은 보물들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시 비잔틴에서만 만들 수 있었던 자줏빛 비단 외투는 고향에서 용맹과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충성 방식은 굉장히 특이한데 이들은 황제 개인이 아닌 황제라는 자리에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 일례로 '니키포로스 2세'가 암살당하고 '요안니스 1세'가 황제에 오른 사건이 있는데 소란 속에 황제를 지키기 위해 전투를 벌이던 바랑기안 친위대는 권력이 계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싸움을 멈추고 새로운 황제가 된 요안니스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사람이 아닌 왕관에 충성한 바랑기안 친위대는 비잔틴 황제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들의 독특한 충성 방식은 수시로 황제가 바뀌는 동로마 제국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입니다.-
수많은 황제들이 인정한 만큼 동로마 제국에서 바랑인들은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내려온 노르만 전사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방문하게 되면 많은 예우를 받을 수 있었고 황제의 친위대로 복무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지원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바랑인들은 비잔틴 제국 곳곳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중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남긴 룬 문자가 유명합니다.
제노바 쇠뇌병 (Genoese Crossbowmen)
이탈리아에서 '콘도티에로'가 성행하던 시절, '제노바 쇠뇌병'은 이름 그대로 제노바 공화국에서 창설된 국가공인 용병대입니다. 스위스인들과 비슷한 '국가 보증'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제노바에서 만들어진 성능 좋은 쇠뇌와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인 파비스를 활용하여 장거리 전투를 벌였습니다.
-콘도티에로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용병대를 의미합니다. 군주론의 모델이었던 체사레 보르자 역시 콘도티에로의 수장 출신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용병으로 유명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품질에 있어서는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가 격렬한 비난을 하며 손사래 칠 정도로 최악을 달리고 있었고 국가에서 공인한 제노바 쇠뇌병은 출범부터 특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총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차 십자군 전쟁'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제노바 공화국에 많은 이권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교전을 벌인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측에 고용되어 불합리한 명령을 따라 참패를 당하는 것으로 위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콘도티에로가 화약 무기를 받아들이고 '스위스 용병', '란츠크네히트' 등 쟁쟁한 경쟁 상대들에게 밀려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욤스비킹 (Jomsviking)
'욤스비킹'은 10~11세기경 활동했던 바이킹 용병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오딘과 토르가 나오는 아사트루, 북구 신화를 믿으며 신앙의 규율에 따라 생활했다는 점인데 이러한 모습이 후기 기사수도회와 닮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용병대였기 때문에 돈만 지불한다면 기독교인들도 이들을 고용할 수 있었고 수많은 전투 경험과 상무 정신으로 무장하고 법을 중시하는 북유럽 인들의 특성은 고용주들을 극적으로 만족시키며 적들을 무너트릴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험을 통과한 전사들만 자신들의 소속으로 받아 주었으며 허락 없이 싸움을 벌이는 것을 금지하고 포로로 잡히거나 전투에서 도주하는 것을 불명예로 삼았습니다. 또한 여자와 어린이는 욤스비킹의 본부에 출입할 수 없는 등 엄격한 규율을 방침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12~13 세기에 등장한 여러 사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그들이 본부로 삼은 위치가 불분명하여 실존 자체에 대한 논쟁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것은 발트해 남안의 '욤스보르그'라는 장소인데, 오늘날의 폴란드 '볼린 섬의 실베르베르크 지역'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빈란드를 발견한 레이프 에이릭손의 이야기도 결국 사실로 드러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개인적으로 이들의 존재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위스 용병대, 란츠크네히트, 바랑기안 친위대, 제노바 쇠뇌병, 욤스비킹을 알아보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용병은 필요할 때만 고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돌아갔습니다.
서로 간의 결속력이 약했던 봉건 사회 초창기에는 각 지방의 영주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이끌고 나온 경우가 많았고 이후에는 중립 국가에서 공인한 용병대와 사설 용병들이 등장했습니다.
지방의 영주들은 자신의 국가과 적대하는 이들에게 용병을 빌려주기 부담스럽게 되었고 개인 사병이 사라졌으며 그 사이를 중립국인 스위스 용병대가 치고 올라오게 됩니다.
스위스 용병대는 기업처럼 사조직화 된 란츠크네히트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민족주의가 발흥하자 외부 세력인 용병은 점차 입지를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독립국들이 나타남에 따라 군사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이들은 많은 용병들을 필요로 하였고 전직 군인들이 그런 수요를 충당했습니다.
이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민간 군사 기업(PMC)으로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하게 그 명맥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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