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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동양의 봉건제

by 늘상의 하루 2020. 11. 17.

봉건제는 역사 판타지 장르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 중에 하나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거나 떨어지기도 합니다. 사회안정을 위해 '기사도'라는 도덕적 의무가 나타나기도 했으며 영지전을 통해 난세에 가까운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왕은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여 충성 서약을 받고 토지를 받은 영주는 자신의 땅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봉건제의 이미지입니다.

 

봉건제는 크게 서양식과 동양식으로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과 만화 같은 컨텐츠에서 등장하는 봉건제의 이미지는 두 방식이 혼합된 짬뽕 같은 성향이 굉장히 강합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봉건제 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으실 겁니다.

 

1. 왕이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신하는 서임식을 받는다.

2. '공후백자남'으로 계급이 분화되어 있으며 서로 영지전을 벌인다.

3. 위와 아래의 구분이 분명하며 상명하복의 군신 관계를 맺는다.

4. 강력한 기사들과 기사단이 존재하며 영주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5. 학교에서 배운 농노와 장원이 떠오른다.

 

어떤 것들은 맞고 어떤 것들은 조금 다릅니다. 오늘은 이것들을 구분 지으며 봉건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봉건제는 '로마와 게르만이 혼합된 유럽의 봉건'과 '주나라의 봉건'으로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먼저 유럽 봉건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유럽 봉건 제도의 기반

로마는 '은대지 제도(beneficium)'를 통해 영토를 관리했습니다.

 

은대지 제도는 전투력은 훌륭했지만 사회적인 문제가 많았던 이민족들을 대상으로 로마의 영향력이 약한 땅을 지급하여 영토를 지키게 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북쪽에는 로마인들과 오랫동안 치고받은 게르만인들이 있었습니다. 게르만인들은 로마인들의 오랜 골칫거리였고 이들은 은대지 제도를 통해 수많은 게르만 족장들을 회유했습니다.

 

게르만은 전사가 주군을 위해 싸우는 대신 전리품을 분배받는 '종사 제도(Gefolgschaft, retinue)'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사 제도를 전문적으로 활용하는 전사 계급을 허스칼(húskarl) 혹은 후스카를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스스로 유랑하다 주군에게 몸을 위탁하는 자유기사와 비슷한 위치의 신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제도가 유럽에 녹아들고 뒤섞이는 동안 로마가 분열되었고 서로마가 멸망하자 황제의 관을 받은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제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Duke, Prince, Baron' 과 같은 작위 역시 로마에 그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영토를 빠르게 확장하면서 효율적으로 관리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한가지 묘책을 떠올렸는데 바로 가신들에게 영토를 하사하되 그에 대한 대가를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받은 봉신들은 주군에게 세금을 바치면서 그가 요청한다면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여 군사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만 보면 상명하복이 원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프랑크 제국은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서 주변 부족들을 쉽게 복속시키기 위해 그들이 전쟁 없이 항복한다면 작위와 함께 빼앗은 땅을 다시 되돌려 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협상에 응한 군주들은 프랑크 제국에 복속되지만 권력을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완전 정복이라고 하기보다는 계약을 통한 합병, 즉 피라미드 자치령과 같은 구조를 띄게 되었습니다.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고 카롤루스 대제를 자신들의 군주로 인정한다면 서로가 군사적인 지원을 제공받을 수 있었으니, 군주는 자신의 봉신이 지닌 자치권을 보장하고 봉신은 세금과 군역이라는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유럽 봉건제가 탄생했습니다.

 

그 때문에 서양의 봉건제는 '쌍무계약'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어느 한쪽이 신의를 저버리면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끝없는 유럽의 분열과 병합의 뿌리가 됩니다.

 

여기서 동양과 서양의 봉건제 관점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당시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가톨릭 교리에서는 군주와 봉신은 같은 자유민으로 동등한 취급을 받습니다. 신분이 더 높다고 해서 핍박할 수 없었고 신분이 낮다고 해서 복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후 봉건제의 기틀을 세운 프랑크 제국은 바이킹과 헝가리인들의 연속적인 침략에서 봉신들의 자지권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고 봉신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이는 곧 제국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군주는 봉토를 받은 봉신들의 자치권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대외적으로 지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봉신이 군주만 믿고 손을 놓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무장병을 꾸리고 용병을 고용했으며 자신의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축성 기술'을 발달시킵니다.

 

기술의 발전은 연쇄적입니다.

 

축성 기술이 진보하자 성을 함락하기 위한 '공성 기술'이 발달했으며 전체적으로 '공학'이 발전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등자'가 유럽 전역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기병의 양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평민 중기병'이 나타났고 기병이 귀족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무력의 이동은 사회 구조를 변화시켰습니다. 평민이 중기병이 될 수 있음에 따라 그들의 발언권이 강해졌고  이는 유럽의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씨앗이 됩니다.

 

카우치드 랜스라 불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기창 돌격 역시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기병 돌격이 이 시대에 탄생했습니다.

 

반지의 제왕 로한 기병대

여기서 '기사단'이라 하면 모두 기사로 이루어진 기병 병과를 떠올릴 수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사실입니다. '기사'는 일반적으로 작위를 받은 전투 계급이며 군주에게 봉토를 받거나 군역의 대가를 받는 자유민입니다. 또한 기사단은 봉토를 받은 기사가 자신의 영지에서 징집하여 이끄는 군대를 의미합니다.

-봉토를 받지 못한 기사도 있습니다. 이는 아래에서 서술합니다. -

 

보통 기사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한다면 그건 기사단이 아닌 기사대라고 부르며 우리에게 익숙한 기사단의 모습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십자군 전쟁'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구호 기사단, 성전기사단, 튜튼 기사단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경우에는 궁전에 대기를 하는 '상비군' 역할이 아닌, 전투 수도승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발원이 종교적인 목표가 강하기 때문에 군주를 지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따로 하우스홀드 기사(House-hold Knight)라 하여 봉토를 받지 못하거나 기간제로 군주를 지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는 군주의 직영지에서 장원을 조금 떼어 받은 이들이 왕궁이나 직영지에 거주하면서 이러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동양 봉건 제도의 기반

그 기원은 '주나라'에서 시작하는데 기원전 11세기부터 3세기까지 있었던 중국의 고대 국가입니다.

-주나라에 앞서 상나라 또한 봉건제가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잡힌 것은 주나라 시대입니다.-

 

농경국가인 주나라는 청동기 문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는 아주 값비싼 물건입니다. 일반적인 농민들은 목기 석기를 쓰던 시대였고 개간이 매우 어려워 비옥하고 무른 땅이 많은 강 주변에서 관개농업을 시작했습니다.

 

농경국가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막대한 일손이 필요하고 인구는 징집할 수 있는 병사가 됩니다.

 

주나라는 농경을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쌓아 올렸습니다. 주나라의 '청동기 명문'에서 나오는 '목야대전'을 보면 기원전 11세기경 주나라는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지만 당시 청동기 문명들은 첨부한 지도와는 달리 도시 국가 개념이었기에 여러 도시를 한 곳에서 관리할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국경이라 함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 아닌 징수(약탈) 가능한 범위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주나라는 이러한 문제를 타파하고자 한 가지 방책을 고안하게 됩니다. 믿음직한 친족들에게 영토를 분봉하여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제후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봉할 봉, 세울 건이라 하여 봉건제(封建制)가 탄생하게 됩니다.

 

공자

주나라에서 탄생한 새로운 시스템 '봉건제'는 '관료제'의 기반을 다지며 거대한 중국 땅에서 국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스템 아래에서 주나라는 막대한 발전과 부를 쌓아 나가기 시작했고 사회의 기틀이 잡힌 그들은 '조선 왕조 실록'처럼 모든 것을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자신들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종법제도(宗法制度)라는 상속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가문의 혈통을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나누어 적장자에게 권력을 상속시켰고, 일종의 직계와 방계 혈통을 나누어 구분하는 것으로 권력을 분열 없이 후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우리 시대에서 중요하다 논하는 세 가지 연(緣) 중에 하나인 혈연(血緣)이 가장 강조되는 사회가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주나라는 관직부터 정치 제도를 정하는 방법부터 건물의 배치와 그 명칭까지 모두 정리했습니다. 노래와 가사를 쓰는 법, 문서를 정리하는 법, 하루의 생활양식과 점치는 법까지 빠짐없이 모두 기록하여 남겨 두었습니다.

-건물의 경우 풍수지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공자'가 구성한 학문을 '유교'라 부르며 동아시아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고도화 되었습니다.

- 주나라는 이주민 출신 주족이 호경에 자리를 잡았고 자신들의 시조를 농경의 신 '후직'이라 했습니다. 이는 농경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앙 발흥의 과정입니다. 사극에서 흔히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직에서 ''는 토지의 신을 뜻하고 '직'은 앞서 농경의 신 후직을 의미합니다. 유교 국가이자 농경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주나라의 관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

 

그렇게 만들어진 주나라의 봉건제는 서양과 달리  제후, , 대부, 가 죄다 친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아들에게, 저 자리는 둘째 아들에게, 먼 자리는 친척에게 분봉하였고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주나라의 통치는 차후 중국인과 이민족을 나누는 개념 '중화사상'의 기반이 됩니다.

 

앞서 멸망한 상나라의 경우에도 봉건제가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중국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데 상나라는 천명사상이라고 왕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유럽의 왕권신수설과 흡사한 이념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최고 통치자인 천자라는 단어가 탄생하였고 통일된 중화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천자의 칭호는 주나라가 계승했으며 이후 중국 왕조들의 전통이 됩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모두 모여 중국을 완성했습니다.-

성곽과 그 안을 표현한 나라 국

주나라의 국민들은 평소에는 성 안에서 살아갔습니다.

 

이 당시 국민은 성 안에 사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문무를 익히며 유사시에 '전차'를 타고 나가 전쟁을 치렀습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그리스의 시민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등자가 없어 말이 이끄는 전차를 전쟁에 주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유럽과 다른 점은 권력이 혈연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신하에게 군주에 대한 충성과 의무가 보다 더 강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계약으로 묶인 서양의 '봉건제'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이러한 혈연 관계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은 중세 후기 유럽에서도 나타납니다. 유럽의 귀족들은 결혼으로 연결되어 족보를 타고 올라가면 서로 가족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전쟁을 하더라도 가능한 귀족을 죽이지 않고 끝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추가적으로 계급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세 유럽을 바탕으로 한 판타지 소설을 보면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이라 하여 주나라의 오등작과 자주 결합되고는 합니다. 이는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사용하는데 문제는 없지만 아래의 점들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Prince와 같이 독립 군주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단어는 차후 왕자로 변화하면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왕자로 번역해야 하는지 군주로 번역해야 하는지 오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작 역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는 자작에 대응하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작에 대응되는 'Viscount'는 영지 없는 귀족, 대리인이자 부백작으로 오등작의 자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봉건제를 알아가면서 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요점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서양

1. 왕이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신하는 서임식을 받는다.

2.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동등하다. 어느 한쪽이 의무를 저버린다면 계약은 파기될 수 있다.

3. 군주는 봉신의 자치권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봉신은 군주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동양

1. 왕이 자신의 혈연 제후에게 봉토를 하사한다. 

2.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상명하복으로 예와 법도를 지켜야 한다.

3. 공후백자남으로 구성된 오등작 계급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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