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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vate Story/Game Play

디스코 엘리시움 - 플레이 리뷰

by 늘상의 하루 2020. 11. 25.

게임으로 표현된 문학, 가장 이상적인 RPG

디스코 엘리시움을 플레이하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깊이 있는 어휘력과 표현, 철학적인 고찰이 담긴 대화가 마치 두터운 한 권의 러시아 문학을 보는 듯했습니다. 내가 게임을 하면서 죄와 벌을 보는 기분을 느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 게임의 매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RPG에서 선택이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요소가 되어 왔습니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이분법적으로 구성되는 선택지는 유저들에게 항상 옳은 길만 선택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이 게임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오직 선택만 있을 뿐 실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실패가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는 보다 더 디스코스럽게 또 다른 갈림길의 연속이 될 뿐입니다. 실패가 의도치 않게 성공적인 결과를 선물할 수도 있고 성공이 의도치 않게 실망적인 결과를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 속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좋은 결과를 쫒기보다는 점점 내가 바라는 모습, 내가 즐기고 싶은 형사가 되어 대사를 고르는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진짜 펑크, 그리고 스팀 펑크

펑크 장르는 게임의 주제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펑크는 저항과 충돌, 그리고 암울한 세계를 표현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펑크 장르들을 생각해 봅시다. 스팀 펑크, 디젤 펑크, 아톰 펑크, 사이버 펑크...

 

이 모든 펑크 장르 속에서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두운 면이 없으면 조심스럽게 펑크를 빼 봅시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표현하기 쉽지 않은 스팀 펑크 장르를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자동 소총이 금지화되고 자동차 대신 '쿠프리 키니마'라는 동력 마차가 돌아다닙니다.

 

최신 컴퓨터는 없고 천공 카드를 사용하며 우리가 전자제품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서로 싸우고 시위하며 대립을 하고 있고 인종 차별이 만연하며 왕은 죽었습니다. 또한 세상은 '창백'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단절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이 활동하는 세상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점령당한 괴뢰 국가입니다. 그곳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경찰로 활동하며 사람들에게 온갖 개소리와 이상한 짓거리를 해도 경찰이라는 직위 때문에 플레이어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세계는 시종일관 진지하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게임의 제목이 주인공이 추구하는 삶을 표현한 것처럼 슬픔과 분노만 가득한 세상에서 기쁨과 사랑, 즐거움을 전도하는 형사의 존재 자체가 디스코이자 펑크가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슬픔과 분노만 가득한 세상에서 저항하는 그 모습, 물론 순응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만 주인공은 끊임없이 독백을 합니다. 옳은가? 틀린가? 하고 싶은가? 하기 싫은가? 끔찍한가? 아름다운가?

 

그건 마치...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줍니다. 특히 평범한 '나 자신'이 아닌 '다중인격의 나 자신'이 된 느낌이요. 게임으로 표현된 문학이라 말함은 여기서 기인합니다.

 

정답 없는 선택지, 그건 우리를 신경쓰이게 만든다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항상 옳은 결정을 강요받아 왔습니다.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손해가 발생하거나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습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그런 건 결코 디스코스러운 방법이 아닙니다. 이 게임에서는 성공적인 선택지가 때로는 실망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때가 있고 실패한 선택지가 때로는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선택지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아니, 뭘 골라야 하지? 이게 맞는건가 싶기도 하고 가장 편한 방법으로 세이브 & 로드 신공을 활용하여 이것저것 다 눌러보기도 합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저 역시도 그런 방법으로 게임을 플레이했지만 어느 순간 내면의 나 자신이 속삭였습니다.

 

[야 그렇게 하니까 재미있냐?]

 

저는 선택지를 다 눌러보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려서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나름 상식적인 선택지를 주로 고르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실수로 엽기적인 선택지를 누르는 순간 제가 게임을 조금 엇나가게 플레이한게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빨아먹든 씹어먹든 상관은 없지만 녹여먹거나 따뜻하게 데워먹는건 좀 아니다 싶은 것과 비슷합니다.

 

전 디스코 엘리시움이라는 아이스크림을 데워 먹고 있었어요.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내가 컨셉을 잡은 대로 선택지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도와주고 싶으면 돕고,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내 캐릭터가 어쩌다 보니 도덕적인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결합된 혼종이 되어버렸지만 엽기적인 선택지가 늘어나서 재미는 있었으니 그런건 상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건 TRPG와 비슷하다고, 실패라는 결과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가 연결되는 TRPG가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펼쳐지고 있던 겁니다. 정답 없는 선택지가 진입장벽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저 시원하게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먹는다면 녹여 먹는것보다 훨씬 더 제대로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너무나 많은 선택지가 있기 때문에 취향에 안 맞는 분들은 더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사위와 트리거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선택의 결과는 주사위로 결정됩니다. TRPG와 같이 모든 선택지는 관련된 플레이어의 스탯을 바탕으로 성공 확률이 결정되며, 파랑, 노랑, 빨강 순으로 이해하기 쉽게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들에게는 세이브 & 로드가 있지만 낮은 확률의 도전이 한방에 터졌을 때 그 쾌감은 상상 이상으로 짜릿한 기분을 선물해주곤 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선택한 대사 지문들에 따라 정보가 수집되고 선택지의 성공 확률을 높여 주기도 합니다. 진짜 탐정이 하는 것처럼 말이죠. 어떤 사건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을 하는 선택지가 있다면 해당 사건의 정보를 수집할수록 분석 성공 확률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반대로 잘못된 선택 지문으로 성공 확률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NPC를 설득해야 하는데 쓸데없이 그를 자극하거나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신뢰를 떨어트리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트리거 요소들이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는 굉장히 치밀하고 디테일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저 대화의 내용을 좀 더 알고자 무의미하게 누르던 질문들이 정말로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주는 상호작용으로서 완성된 것이죠. 제가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질문들과 정보 수집들로 인하여 진짜 형사가 된 느낌을 받았고 진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세상의 종말을 떠드는 형사에게 마음 속 비밀을 털어놓고 싶을까요.


결론

디스코 엘리시움은 정말 잘 만든 RPG입니다. 마치 TRPG를 그대로 게임 속으로 옮겨 놓은 듯한 게임 플레이 스타일은 가장 이상적인 RPG는 이래야 한다는 듯이 당당하게 저를 게임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확률 속에서 벌어지는 실패 없는 선택지, 유의미한 질문들, 진짜 냄새가 나는 스팀 펑크, 러시아 문학같이 파고드는 희로애락 시나리오, 그리고 그라피티 같은 색조와 보드카처럼 독하고 진한 성우들의 연기가 게임을 플레이할수록 점점 더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좀 과몰입해서 독백을 따라 읊기도 할 정도로 재미있는 게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