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문적인 밸런스 팀을 갖춘, 완전 분업화된 회사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게임 밸런스는 자연스럽게 업무에 달라붙어 떨어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작업 환경은 분명하게 장단이 있습니다. 업무는 가중되지만 사고는 넓어집니다. 밸런스 담당자와의 핑퐁 없이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수정할 수 있으며 작업 과정에서 기획 의도가 달라지는 상황이 줄어듭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상상과는 다른 업무 처리 과정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밸런스 업무를 시작하는 기획자들은 이상적인 황금비를 찾아 나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백씨의 만능 양념처럼 어디에 가져다 붙여도 일맥상통하는 기적의 밸런스를 찾아 나섰고, 완벽하진 않더라도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 자신만의 기조를 설립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기획자를 죽이고 싶은 사기 캐릭터
사기 캐릭터가 나오면 커뮤니티는 불바다가 됩니다. 업데이트를 힐난하고 존재하지 않는 밸런스 팀을 창조합니다. 작업을 담당한 기획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길 기원하고 어머니를 찾습니다.
얼굴을 공개하고 활동하는 디렉터들은 한낱 장난감이 되어 조리돌림을 당하기에, 상사의 막연한 무게감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슬프게도 여론이 불바다가 되는건 회사도 기획자도 원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임들은 정기적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출시합니다. 캐릭터는 게임의 핵심 BM이고 수익창출을 위해서는 시장에 더 좋은 상품을 제안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더 좋은 상품이란 단순히 강한 사기 캐릭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커뮤니티에서 흔히 거론되는 황금 밸런스를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개발은 기획 단계부터 황금 밸런스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보통 유저들이 인식하는 황밸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원하는 황금 밸런스는 잘 팔리는 성능 캐릭터지만 유저를 화나지 않게 만드는 수준을 의미합니다. 유저는 기존 가치를 유지하면서 좋은 캐릭터가 나와 공정한 플레이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공통점이 있지만 방향은 다릅니다. 밸런스 기획자가 할 일은 두 진영의 수요를 만족시키며 적절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고 이건 꿈과 낭만을 품은 기획자에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커뮤니티가 불타는 사기캐는 적절한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대로 나가면 사기캐 되서 망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 '
' ??? : 아 괜찮아 '
이렇게 된거 모두를 만족시키는 황밸 캐릭터를 최대한 잘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밸런스 포지셔닝
가장 쉽게 황밸 캐릭터를 만드는 첫 번째 방법은 빈 자리를 선점하는 겁니다.
- 마케팅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
이게 성공하면 갓캐이자 황밸의 첫 단추를 꿰어낸 거지만 보통 그런 자리를 찾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획자들은 없는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속에는 수많은 역할군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딜러, 탱커, 서포터로 구성된 게임계의 삼위일체를 바탕으로 역할군의 조합식이 완성됩니다.
세 가지 중 두가지를 섞어 신규 포지션을 창조합니다. 물고 물리는 속성 개념을 도입합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무기와 방어구의 상성을 넣기도 하고, 피해를 반으로 나눠 물리 피해와 마법 피해로 구분짓습니다. 거리에 따라 근접 공격과 원거리 공격을 구분하고 지상 공격과 공중 공격, 지상 이동과 공중 이동을 나눕니다.
기획자들이 밥먹고 쪼개기만 연구하는 것처럼, 별별 것들이 다 튀어나와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캐릭터를 배치시킵니다.
6가지 클래스 타입과 5가지 속성 타입이 있으면 최소 30개의 포지션이 생성됩니다. 여기에 전열, 중열, 후열의 위치 요소를 고려하면 90가지의 포지션이 만들어지며 주문 공격과 마법 공격으로 스테이더스를 분할하면 쓸모의 여부를 떠나 비슷하지만 겹치지 않는 180가지 포지션이 마련됩니다.
이렇게 쪼개진 포지션은 작은 조정 하나만으로 독자적인 포지션을 구축할 수 있으며 밸런스 리스크를 최소화합니다. 리스크가 최소화되니 전투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 장점은 부각되고 단점은 은폐할 수 있습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명문은 게임 밸런스에도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쪼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라면 지나치게 많은 포지션은 지나치게 많은 고려사항을 유저에게 요구합니다. 또한 고유명사를 사용한 클래스 명칭은 직관적이고 단순한 정보 전달을 방해합니다. 충분한 학습 과정이 없다면 이는 진입장벽으로 연결됩니다.
반면 기획자가 쪼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포지션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통 PVP 컨텐츠가 활성화된 게임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유저들의 플레이 메타가 고착화되며 이러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기믹을 지닌 캐릭터가 이에 해당합니다. 보통 카운터 포지션이라 합니다.
라이브 서비스중인 게임은 이러한 카운터 포지션을 만들기 쉬운 환경이 제공됩니다. 단순히 유저들의 현 메타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캐릭터를 기획하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카운터 포지션은 쉬운 만큼 막대한 리스크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존 유저들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악수가 될 수 있으며, 당장은 수요를 만들지라도 반복적인 사용은 부정적인 학습을 야기합니다. 내가 구매한 상품의 가치가 다음 업데이트에 도루묵이 되는데 이는 서비스 제공자 측면에서 거위 배를 가르는 자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기에 강점과 약점이 중요합니다.
고착화된 기존 메타를 타파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기존 캐릭터로 새로운 캐릭터에 대응할 수 있다면, 물고 물리는 순환을 만들어 유저들의 기존 가치를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들도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기존에 자리를 선점한 캐릭터를 밀어내야 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부정동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타파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주목할 점은 유저들의 니즈가 단순히 효율 측면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 컨셉 플레이, 내러티브 요소가 있으며 이는 캐릭터 가챠 게임에서 막대한 지분을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신에게는 아직 이격 캐릭터가 남아 있습니다.
- 대표적으로 페이트 시리즈가 있습니다. IP 게임들은 신규 캐릭터나 세계관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기존 캐릭터를 다르게 만든 이격 캐릭터가 필연적으로 등장합니다. -
기준이 없다면 끝나지 않는 작업
변수가 발생하는 게임에서는 계산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 쉽습니다. 유저 플레이와 확률로 이루어진 과정이 어느 순간 판을 뒤집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확실성 요소가 나쁜 건 아닙니다. 오히려 게임의 긴장감을 유지시키고 뻔한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준을 세우고 진행하는 시뮬레이션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기준 없이 감과 추측으로만 이루어진 설계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최소한의 기준점을 만들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 단위, 스테레오 타입, 교환비, 증감값
스테이더스의 기본 단위를 표시할 때, 한~두 자리 수의 값은 손쉬운 계산이 가능하지만 증감에 따른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집니다. 장비나 버프 같은 유틸리티나 에드온이 많은 게임이라면 소수점으로 발생하는 추가, 감소값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단위가 크면 클수록 정보의 시인성은 떨어지지만 밸런스 리스크는 감소합니다.
- 단순한 만큼 한계가 명확하기도 합니다. 또한 과도할 정도로 높은 단위값은 정보의 시인성이 사라져 계산을 어렵게 만들고 상호작용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스테레오 타입의 의도는 단순합니다. 유저들이 이해하기 쉬운 값으로 접근하여 정보 학습 과정을 단순화 시키는 겁니다. 딜러는 공격력이 높고, 탱커는 체력이 높습니다. 진리에 가까운 명제지만 이를 벗어나면 유저도 작업자도 괴로워집니다.
교환비는 게임의 기본적인 교전시간 TTK(Time to kill)를 결정합니다. 일반적으로 상황 파악, 반격 기회, 종료의 매커니즘을 지닌 체력과 공격력의 3:1 비율을 추구합니다. 첫 공격으로 서로 상황을 파악하고, 두 번째 공격으로 반격 기회를 주고, 세 번째 공격으로 상황을 종료하는 의도가 있으며 교환비는 전투 시스템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경됩니다.
증감값은 장비를 비롯한 추가적인 에드온과 버프, 디버프를 고려한 요소입니다. 단일 캐릭터가 뽑아낼 수 있는 최대값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합니다. 캐릭터 성장에 따른 격차를 줄이고 고정적인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장비의 성능은 보통 상수값을 사용합니다. 추가적으로 강력한 BM과 파밍 요소가 될 수 있어 확장성과 신규 컨텐츠를 위함도 있습니다.
스킬의 버프, 디버프는 캐릭터의 성장을 따라가기 위해 백분율로 적용됩니다. 여기에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증감값의 한계를 걸어두는 캡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가시적인 성능을 유지하고 여지를 남기기 위해 보통 20:80 비율로 산정되며 게임 시스템이나 컨텐츠에 따라 비율은 조정될 수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발생할 수 있는 사이드이펙트와 밸런스 고려 요소, 이에 따라 발생하는 추가적인 공수를 생각하면 라이브 서비스 게임에서 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
이야기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캐릭터의 기준값을 정하고 작업을 진행한다면 밸런스를 어떻게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습니다.
또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할 수 있으며 결과값에 설득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안정적인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없는 사이드 이펙트를 최대한 줄여줍니다.
라이브 서비스 중이거나 이미 기반이 마련된 게임이라면 이러한 과정을 압축할 수 있습니다. 기존 캐릭터 풀 안에서 비어있는 포지션을 찾거나 유사 포지션 캐릭터와 비교하여 독자적인 강점과 약점 포인트를 구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기초적인 클래스와 속성, 스테이더스 분배가 끝나면 스킬 유틸리티를 할당해야 합니다.
보통 많은 게임들이 여기서 캐릭터의 강점이 결정됩니다. 같은 포지션의 유닛이라도 누구는 침묵 스킬을, 누구는 기절 스킬을 지니고 있음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강력한 단일 스킬을, 넓은 범위 스킬을 쓰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고, 순간적인 추격 능력을, 강력한 아군 보호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 따라 용도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강점과 약점을 명확하게 구분하는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게임 룰을 위해, 좋은 걸 하나 주면, 나쁜 걸 하나 주어야 합니다. 캐릭터 수집형 게임에서 흔히 존재하는 고등급의 유닛이라면 장점을 하나 더 주더라도 단점은 빼면 안 됩니다.
팔방미인 캐릭터는 둘 중 하나입니다. 여론이 불타는 사기 캐릭터거나 줘도 안쓰는 어중간한 유닛이거나, 그렇기에 모든 방면에서 특출난 캐릭터를 만드는 것보다 피자 조각처럼 강점과 약점이 분명한, 첨예한 캐릭터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수의 덱을 구성하는 게임에서 조각을 맞춰 하나의 덱을 구성하는 유닛을 지향한다면 밸런스 리스크는 줄이고 캐릭터의 강점은 부각하며 약점을 은폐하는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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