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4박 5일로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친구가 오사카에 살고 있어 언어의 장벽은 한껏 낮아졌지만 지나치게 전적으로 의지한 나머지 사전 정보와 포켓 와이파이 없이 여행을 하게 되어 어려움이 있던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와이파이 꼭 챙기세요-
하지만 좋았던 점도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계획 속에서 색다른 장소를 경험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점들이 진짜 의미 있는 경험을 만든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나가는 해외 여행이기에 준비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녀오고 난 후 돌이켜보면 '잘 다녀왔다' 싶은 뿌듯함이 가득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고 친구에게 고맙습니다.
여행 코스는 오사카와 교토,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세부적인 계획 없이 커다란 틀만 잡혀 있어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계획을 바꿔가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고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을 겪으며 현지인들의 삶 또한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사카
오사카 일정은 크게 없습니다. 도심 여행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 오사카에 있는 친구 집을 거점 삼아 다른 도시에 있는 관광지를 다닐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후 간사이 공항에서 교통편을 알아보며 살짝 멘탈이 흔들렸습니다.
일본은 민영화로 인해 같은 철도를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노선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잘못 탑승하면 원하는 역을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환승을 할 때면 티켓을 새로 뽑아야 하는 것도 충격적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일반선, 준 급행선, 급행선, 특급선 이런 식으로 분류가 되어 있는데 각자 가격이 다르고 목적지에 맞는 금액표를 뽑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 여행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어지러웠습니다.
친구의 잘못된 권유로 포켓 와이파이 없이 공항을 나왔으나 핫스팟이 안 터지는 관계로 와이파이가 없는 곳에서는 인터넷 없이 쭉 일본을 여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휴대폰 화면보다 주위를 둘러보는 시간은 많아져 생각보다 꽤 나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다음에는 꼭 챙겨가려 합니다. 불편한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일본 물은 붓통에 담긴 물처럼 청록색을 띠고 있더라구요.
전철 관련하여 겪은 엽기적인 일화는 탑승 플랫폼을 철도측에서 도착 5분전에 바꿔 혼선이 생긴 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자칫 마냥 전철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경악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민영화 노선이라 그런지 지하철 대기 의자가 사용자 입장에서 비효율적인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 꽤 재미있었습니다.
첫날에는 오사카성을 보고 왔습니다.
구조적으로 요새화에 몰두했다는 인상 외에는 심미적인 요소에서 크게 감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의 궁궐과는 달리 세밀한 문양이나 조형 없이 백색으로 단일화하여 모두 칠한 디자인은 아쉬었으나 커다란 바위를 쌓은 성벽과 깊은 해자, 성벽에 뚫린 총안들은 진정으로 성의 목적에 맞는 건축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커다란 바위를 깎아 치밀하게 쌓아 올린 건축 기술과 요새가 지닌 능력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볼거리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이 외에는 관심 가는 지역이 없어 친구가 소개하는 맛집을 따라 가볍게 밥을 먹었습니다.
점심은 덴뿌라 정식을 먹었는데 인터넷에 알려진 맛집이라 그런지 줄이 꽤 길었습니다. 그때그때 튀겨서 나오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따뜻하고 바삭한 튀김을 이어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간장이 치트키 수준으로 달고 맛있었습니다.
저녁으로는 친구 집 앞에 있는 라면집을 갔는데 소뼈로 우려낸 사골 육수 베이스로 이루어져 있어 잡내 없이 진한 국물 맛과 쫄깃한 면발이 인상적인 집이었습니다.
살짝 얼큰한 맛이 가미되어 물리지 않고 끊임없이 국물을 들이키게 만들었고 처음으로 일본식 라면을 국물까지 모두 마신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습니다.
사장님이 오후 6시부터 장사를 시작해서 10시까지밖에 운영을 안한다고 하지만 오는 사람들만 오는 가계인지 줄 없이 바로 들어가서 먹을 수 있어 이점에서도 극찬을 주고 싶습니다.
교토
둘째 날부터는 교토를 여행하며 1박 2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사카에서 복잡한 환승과 함께 값비싼 일본 교통비를 지불하고 철도를 따라 쭉 올라갔습니다.
일정으로 첫날은 이나리 신사와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둘러보고 둘째날에는 금각사와 대나무 숲 아라시야마를 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첫날 늦장을 부려 이나리 신사는 패싱하게 되고 바로 청수사로 이동했습니다.
-수백 개가 넘는 토리이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죠...-
청수사로 가기 전에 교토 국립 민속박물관에 들러 내부 관광을 하고 왔습니다.
아쉽게도 특별전시회라 사진을 찍는 건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는데 주요 테마는 차 문화와 관련된 내용으로 일본이 지니고 있는 다도 용품과 문헌, 그림들 그리고 중국과 조선에서 수입한 다기들을 전시하는 자리였습니다.
참 기묘한게 유물들을 둘러보면 중국에서 만들어진 다기들은 굉장히 깔끔하고 심미적으로 완성된 반면 일본에서 만든 다기들은 투박하고 모양이 잡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옛날에는 명품이었지만 지금은 절하된 중국산과 관계가 뒤집힌 일본 제품들이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림이나 문헌들을 통해서도 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그림에 담긴 옛 일본인들의 밥상을 보면 조선 시대처럼 밥을 고봉으로 쌓아 가득 담아서 먹었던 때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방문한 박물관은 언어의 장벽이 있어 설명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만큼 유물 자체에 집중하여 배경을 유추하는 과정이 꽤 즐거웠습니다.
청수사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서 옛 것들과 지금 것들이 섞인 거리를 걸으며 다양한 노점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해외 관광객을 통제하고 있어 생각보다 인파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올라간 청수사의 경관은 정말 운 좋게 시기를 잘 잡았구나 싶을 정도로 멋지고 아름다웠습니다.
가을의 단풍과 노을의 빛깔 그리고 청수사의 건축이 어우러져 자연과 하나가 되는 듯한 절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목조 건축으로 높고 웅장한 건물을 세워 올렸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그러면서도 일본의 토착 신앙과 결부하여 신불습합이라는 독특한 신앙 세계를 만들어낸 청수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아래에서는 팥죽을 팔고 있었는데 휴식 삼아 들어갔으나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고 훌륭한 맛을 지니고 있어 피로는 씻겨나가고 기분 좋은 단맛만 남아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팥죽은 되지고 진한 맛이 강한데 청수사에서 먹은 팥죽은 묽고 깔끔한 맛이 좋았고 반찬처럼 같이 나온 짭짤한 다시마와 차가 맛의 균형을 잡아 물리지 않고 깨끗하게 비울 수 있었습니다.
셋째 날에 방문한 금각사는 구름 한 점 없는 굉장히 좋은 날씨로 산뜻하게 출발했습니다.
입장시 필요한 티켓의 디자인이 부적처럼 되어 있어 심미적으로 굉장한 인상을 받아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평범함을 벗어난 예상 밖 컨텐츠는 항상 즐거운 이야깃거리를 남겨 주는 것 같습니다.
커다란 노송들을 지나 호수 옆에 만들어진 금각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름처럼 목조 건축에 금박을 입힌 것으로 절제되고 조화로운 표현보다는 금으로 도배한듯한 거침없는 디자인이 튀는 건물이었습니다. 주변 조경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않는 모습에 살펴보니 복원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금을 사용해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부는 공개되지 않아 들어갈 수 없었고 이어진 정원의 길을 따라 걸으며 접할 수 있는 신사와 조형들을 감상하며 유람을 즐겼습니다.
참고로 금각사라고 해서 금을 사용한 음식들을 주변에서 팔고 있는데 금가루가 뿌려진 아이스크림이라던지 녹차라던지 얼척이 없는 가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취식은 선택사항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대나무숲 아라시야마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걷다가 발견한 경전철 기타노하쿠바이초 역입니다.
가벼운 환승 한 번으로 아라시야마까지 쭉 직행하기 때문에 노선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금각사에서 20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탑승하게 됐지만 제가 컨텐츠에서 접했던 일본의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았던 장소였습니다.
주택 사이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한 칸의 경전철이 경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고 아날로그 감성 가득한 건널목과 간이역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줬습니다.
철로가 하나뿐인 구간에서는 상대 차량이 지나갈 때까지 역에서 대기하는 등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장면도 볼 수 있었고 생활하는 공간 사이사이를 철도를 따라 지나가면서 이곳에 살면 꽤 불편하겠구나 싶은 감상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겪었던 가장 일본스러운 분위기를 담고 있어 기회가 된다면 해당 노선을 꼭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아라시야마에 도착하고 노점에서 여러 음식을 먹었습니다. 고기말이 주먹밥 튀김, 새우와 오징어 꼬치, 이카야끼 등등 하지만 역대급 음식은 오이 꼬치였습니다.
친구가 사줘서 먹었는데 공포 그 자체였네요. 통으로 꼽은 촉촉한 오이 피클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간식이었어요.
아무튼 골목길을 따라 아라시야마로 들어갔습니다.
멀리서부터 풍겨오는 짙은 향 내음과 숲의 흙내가 어우러져 천천히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이들 찾아오셨는데 죽림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건강을 챙겨가고자 하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숲행을 따라 걸으면 티켓을 구입해서 들어갈 수 있는 특별 코스가 나옵니다.
여기서 꽤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티켓을 사고파는 것이 아닌 깔끔하게 잘 나온 아라시야마의 사진엽서와 차 티켓을 함께 건네주었습니다.
가벼운 등산을 하듯 일본 특유의 조경이 가미된 오솔길을 자박이며 관광지로 남은 옛 집과 신사를 지나 크게 돌아 나오면 보이는 쉼터에서 직원이 다가와 차 티켓을 받아갑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잘 끓인 말차와 다과가 나와 달고 맛있게 충전할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입장권을 파는 것이 아닌 오감을 자극하는 추억을 파는 그들의 관광 마케팅에 순수하게 감탄했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4일 차에는 도심 속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슴과 세계 최대의 청동 불상이 있는 도다이지를 보러 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시골이었고 생각보다 맛있는 명소가 많았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몰랐는데 유튜브에서 굉장히 유명한 일본의 떡 만드는 영상의 장소가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 옆집에 있는 유부주머니 우동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허이 허이 하면서 떡을 찧는 직원들의 모습에 여기가 거기구나 싶어 하나 먹었습니다.
살면서 먹은 떡 중에 최고라 해도 부족함 없을 정도로 장난 아니었습니다.
녹색 떡에 앙금을 넣고 콩가루를 바른 따끈따끈한 모찌는 손에 쥐기 무섭게 치즈처럼 흘러내렸고 한입 베어 물자 모짜렐라처럼 쫄깃 촉촉 사진도 못 찍고 마냥 감탄만 나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기념품으로 모찌나 한 박스 사가자 싶었으나 직원분이 말하기를 권장 유통기한이 하루라서 아쉬움 가득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먹으려고 했던 유부주머니 우동은 인터넷으로 꽤 유명해서 그런지 줄이 굉장히 길었고 마냥 기다리기 싫어 인터넷에서 대충 근처 소바집을 찾아 친구와 함께 이동했습니다.
조용한 골목에 허름한 입구가 인상적인 소바집이었는데 들어가니 할머니 한분이 가계를 보고 계셨습니다.
자리에 앉아 소바와 나라의 명물이라는 감잎 초밥을 시키니 생각지도 못한 맛집을 찾아 기뻤습니다.
한국에서 먹던 메밀면과 달리 칼국수 면발 같은 쫄깃한 소바는 씹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분이었고 추가로 시킨 감잎 초밥은 밥알부터 생선살까지 쫀득한 감칠맛에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돌아서 도착한 식당이었지만 그 덕분에 최고로 즐거울 수 있었던 선택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사슴공원과 도다이지로 즉각 향했습니다.
나라에서는 사슴들을 거리에 풀어놓고 공존하며 살아가는데 평화로운 사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기에 썩 나쁘지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사슴 똥내는 좀 그렇긴 하지만요-
관광객이 무언가 먹을걸 가지고 있으면 다가와서 나에게도 그걸 줘! 라고 말하듯 머리를 흔들며 인사하는데 근처에서 파는 사슴 과자를 사서 먹여주면 됩니다.
도다이지는 들어가는 남대문부터 양측에 웅장한 조각상들이 버티고 서 있어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안쪽에는 거대한 청동 불상과 그 앞에서 염불을 읊는 스님이 있었고 주변을 빙글 따라걸으며 초에 불을 붙여 보았습니다.
역사가 담긴 고즈녁한 절 안에서 향 내음을 맡으며 염불 소리를 듣는 경험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첫 해외 여행이자 일본 여행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쉽게도 방문하지 못한 장소들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방문하기로 약속하며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나리 신사와 히메지 성과 같은 명소가 아마 다음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꽤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던 훌륭한 경험이었습니다.
단순히 유적지를 관리하고 입장시키는 것을 넘어서 관광지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끌어내기 위해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써서 컨텐츠를 구성하는 이들의 관광 마케팅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청수사에서 먹은 팥죽과 금각사의 부적 입장권, 아라시야마의 차 티켓, 나라의 사슴 센베들은 해당 명소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꿔주는 강력한 포인트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이처럼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관광 마케팅이 보다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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