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게 만든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이버펑크 게임에서 채워주지 못한 부족한 점들을 애니메이션에서 충족할 수 있어 더욱 만족스러웠던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물개박수를 쳤던 아케인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서사였습니다.
아케인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비슷한 꿈을 꾸지만 다른 배경으로 인하여 대비되는 차이를 보여주며 주인공들이 어떻게 문제를 시원하게 타파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이버펑크는 인물들이 꿈을 꾸지만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하였고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들을 보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잠깐 멈추고 자신을 돌보기를 바라게 만드는 불안감이 더 컸습니다.
어찌 보면 같은 펑크 속에서 아케인은 이상을 그렸고 사이버펑크는 현실을 그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인물들에 대한 정보량의 차이도 있었으나, 전자는 그나마 희망이 있었고 후자는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아찔하고 깊은 감정이 느껴졌던게 아닐까 싶은 생각입니다.
게임에서 원했던 서사의 등장
사이버펑크 게임을 재미있게 플레이하긴 했지만 가장 아쉬웠던 점은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아닌 서사였습니다.
게임의 메인 스토리는 플레이어가 중심이 아닌 머릿속에 공생하는 렐릭 정신체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유저는 메인 스토리에서 끊임없이 그의 이야기에 끌려다니며 다른 사람의 꿈과 사상을 강제당해야만 했습니다.
수동적인 임무와 목표로 가득했기에 펑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결국 남의 이야기일 뿐, 마음을 움직이는 서사적 몰입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사이버펑크 게임의 사이드 스토리를 더 좋아했습니다. 개성있고 매력 넘치며 무엇보다도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엣지러너에서는 그러한 불만족을 완벽하게 채워줬습니다.
데이비드 마르티네즈라 불리는 주인공의 신념과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변 조연들에 대한 포커싱과 매력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있을 법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보완하며 영향을 주는 개성 있는 조연들은 서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끌어올리며 여운을 남겨 주었습니다.
사이버펑크라는 뒤틀린 세계 속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세계관의 인물들을 훌륭히 그려냈으며 사이버 사이코시스에 대한 연출과 세계관에 대한 은유적이고 매끄러운 표현들은 작품이 끝난 후에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거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조금 더 인물간의 서사와 관계를 풀어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도 있었지만 모든 아쉬움이 수용될 정도로 재미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엄지를 치켜들 수 있습니다.
잘 만든 작품은 끝나도 이야기가 남는다
잘 만든 작품은 작품이 끝나도 사람들이 이야기할 소재를 던져 준다고 생각합니다.
엣지러너는 시계부품처럼 정교한 디테일과 연출 속에서 매 편마다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은유적인 표현들이 보는이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사이버 사이코시스로 미쳐버리는 위험을 짊어지면서 끊임없이 육체를 개조하고 강화하고 위험 속에 뛰어들고 하루살이 불나방처럼 몸을 내던지며 덧없이 사라지고.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겉모습으로 감춘 속마음은 어떤지, 그리고 그들의 뒷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애니메이션 곳곳에 조심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돈을 더 넣어야 남은 빨래를 마무리하는 세탁기, 등교길에서 약과 BD에 취해 딸딸이를 치는 미친 사람들, 관리되지 못한 건물과 거리를 통해 보는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유추하게 만듭니다.
그나마 머리가 좋아 거금을 주고 상류층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가난한 주인공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걷돌며 그러한 주인공이 폭발하는 트리거까지 빨려들어갈 정도로 매끄럽고 몰입감 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보며 가장 놀랐던 점은 인물의 가난과 부를 비교하는 것이 주인공이 아닌 이야기를 보는 저 자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비관하거나 내색하지 않고 감정을 억지로 씹어 삼키며 끊임없이 발버둥칩니다.
과장 없이 그저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인물의 표현에 그저 몰두할 뿐이었고 그렇기에 더 와닿았습니다.
어쩌면 인류가 갈 수 있는 길이기에 이야기의 서사는 판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무게감으로 다가왔으며 펑크적인 메세지는 머릿속을 관통하고 지나가 간단한 상념을 하나 남겼습니다.
이런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잘 만든 작품은 작품이 끝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갑니다.
이번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명작의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 없는 작품이었으며 아쉽게 끝났던 사이버펑크 게임에 대한 부족함을 채워 준 고마운 작품이었습니다.
CDPR은 당장 엣지러너 2기를 만들어라
'Private Story > 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여행기 - 22.11.23 (0) | 2022.12.06 |
---|---|
부산 방문기 - 22.11.18 (0) | 2022.11.21 |
그림 그려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 Dall E 리뷰 (0) | 2022.08.03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아즈텍 문명 - 전시 관람 (0) | 2022.07.11 |
[12월의 컨텐츠] 단독 공연 Dosii [樂園의 도시] (0) | 2021.12.01 |